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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D. life/Sociology

‘죽음’의 세속화

by S.jeanne 2014. 3. 25.

<종교와 문화 _ 류성민 교수님 과제>

 

죽음의 세속화

사회학과 201227016 최하니

 

귀욤 미소의 sauve-moi오랜만에 집어든 소설이었다.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첫사랑이던 전 부인을 잃었다. 남자는 매일아침 출근길에 묘지에 들러 한참을 앉았다 일어나곤 한다. 샘 갤러웨이는 지난 일 년 동안 단 하루도 바지지 않고, 병원에 출근하기 전 묘지부터 들렀다. 그는 매일처럼 반복되는 이 진지한 의식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이.’ 소설에서는 그의 행동을 진지한 의식이며 그것에 중독되어있다고 표현했다. 이런 그가 자신의 연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벌이는 일들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옴니버스형식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사자의 신분으로 산자들의 세상에 잠시 내려오며 그녀가 자신의 연인과 딸을 마주치게 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를 잃은 연인과 딸의 상심에 대해, 주인공이 죽은 부인과 연인을 통해 느끼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작가는 세밀히 추적한다.

이 책을 한참 읽어내려 갈 때에 수업의 주제가 마침 죽음이였던 덕분에 읽고 있던 소설이 주는 죽음에 대한 여러 시사점들을 구체화 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업의 끝에 들은 죽음에 대한 애도는 산사람을 위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소설에서도 만연히 드러나 있었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분명 두려울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죽음을 향유하는 것은 결국 살아남은 사람이다.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먼 고대에서부터 종교적인 죽음의례는 지속되어 왔다.

 

종교학계에서 세속화론이 득세를 차지하던 때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에 이는 근거가 약한 주장이다. 여전히 종교인의 수는 증가하고 있고(이슬람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지난 근대화의 시간동안 종교계의 적극적인 사회운동에의 참여 등의 이유로 전체 종교인의 수는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죽음의례의 종교성에 대해 살펴보자면 그 세속화 경향이 비교적 뚜렷이 드러난다.

죽음의례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특히 무종교인들에게서 확연히 나타난다. 장례의 과정이 병원이나 상조회사의 손에 맡겨지면서 한국의 무종교인들은 장례과정에서 할 일을 잃었다. 더 이상 곡을 할 필요도, 염을 할 필요도 없으며 상주는 상주대로 조문객은 조문객대로 장례식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게 된다. 이러한 편리함은 죽음의례가 통과의례로서의 비 일상성적인 성격을 잃게 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병원 장례식장이 장례식이라는 의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과의례에 대한 훼손은 남은 자들에게 죽음을 충분히 향유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제대로 이별을 할 수 없게 하며 추모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는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 시키는 더욱 심각한 문제도 야기한다. 이제 장례식의 장소가 병원이 아닌 경우는 큰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게다가 장례식의 장소가 병원으로 한정된 것만큼 죽음의 장소도 병원으로 제한되어있다. 이는 죽음을 특정 장소인 병원으로 격리하는 현상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이러한 격리는 죽음의 문제를 금기시하게 만든다. 성 행위의 장소가 부부의 닫힌 안방으로 격리된 것이 성을 금기시 하게 만들고 이러한 폐쇄가 도착증 등의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일으킨 것처럼 죽음의 문제도 더 이상 자연스럽게 다뤄지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노인들의 경우, ‘나이 듦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며, 그것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있는(마치 감옥과 같은)병원, 혹은 장례식장과 상주회사의 몸을 내맡기는 치욕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에게 자식들은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라는 이야기를 할 따름이다. 순전히 부모님을 잃기 싫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 일까.

 

이렇듯 죽음의 세속화가 슬픔, 그리고 죽음을 향유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또한 죽음을 병적인 것으로 격리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근대 과학의 산물이 비과학적, 전근대적인 종교성으로부터 인간을 합리적으로 구출해 낸 듯 굴며 탈 종교적이길, “합리적이길 요구하지만 이 사회가 진정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위험이 고도로 통제된 사회라는 것은 위험요소가 사라진 사회라기보다 숨겨진 위험을 처리할 수 없는사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보험을 들어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슬픔을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다시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힌두교인 들이 생에의 1/4주기를 바쳐 죽음을 준비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종교성을 획득하는 일은 노인들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자들을, 또 남은 사람들을 더 편안하게 할 것이다. 건강히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나이 듦에 대해 숨기는 사회 보다 나이 듦에 대한 진심어린 경외를 표현하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진보된사회이며 죽음의 세속화 현상에 대해 알고, 탈 종교적이기를, 세속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해 반()해보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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