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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ology

Religion and Science, final exam

by Sociology/ FPE S.jeanne 2016. 11. 24.

<Religion and Science>, 2014 final examination

prof. Yoon-sung KIm


answered by Hanee Choi

(Do not share without permision)



1.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무신론자, 유신론자, 불가지론자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서술하시오. (종교전쟁 1)

종교전쟁1, 과학이 종교에게, “종교의 유통기한은 이제 끝나지 않았나요?”는 과학자 장대익의 물음 제기로 시작된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종교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학의 시대임에도 종교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종교간 전쟁이나, 종교로 인한 갈등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과 중동의 근본주의 이슬람의 문제로 인해 보다 회자되고 있는 현상도 짚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교에 대한 문제의식의 최전선에는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등을 통한 도발적인 계몽운동을 장대익은 소개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가 없다면 종교 없는 세상에 올 평화를 그리는 비틀즈의 “imagine”을 패러디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의 강한 중심 주장은 종교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여, 무신론의 세계로 탈출해 당신의 지성을 구하라는 것이다.

또한 장대익은 윌슨의 생명의 편지를 함께 소개하며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려한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가 회자되는데, 이 책에서 윌슨은 생태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의 협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장대익은 종교계에 시비를 걸고 있는 도킨스와 종교와 협력하길 원하는 윌슨이 모두 현대 진화론의 거장인 점이 흥미롭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들도 함께 소개하며, 진화생물학자들이 종교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도킨스의 과학이 종굘제거할 것이라는 생각. 둘째, 둘의 세계관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협력해야한다는 윌슨의 생각. 셋째, 굴드의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생각.

그러면서 끝으로 이런 논의들이 우후죽순 나오고 확산되어가는 것이 종교의 또 종교의 ’(밈 이론은 2장 이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된다.)의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종교인 수가 줄지 않는 것은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왜 함께 종교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이에 대해 유신론자인 신학자 신재식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답을 보낸다. 그가 편지를 쓰며 머문 코차밤바의 풍경을 이야기하며 종교와 과학은 공존의 관계임을 주장한다. 그 첫째 근거는 인류의(기독교신앙의 근거지이던 유럽)의 역사에서 과학은 신학과 자매와 같은 관계였다는 것이다. 중세를 지배한 두 권의 책 중 한 권은 성서이며, 다른 한권은 자연으로 그 둘의 연구 모두 신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했음을 짚어낸다. 그래서 과학은 실상 많은 부분 교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17세기 과학 혁명의 위대한 개척자나 설립자들은 대다수가 신앙이었다.

이후 18세기 과학자 집단이 생겨나며 과학은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종교인은 더 이상 모든 지적 작업을 독점하지 않게 된다. 그 과정에서는 다툼도 있었지만 화해할 수 없는 정도의 대립구도를 보이지도 않았다고 신재식은 분석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언제 시작된 것인가? 신재식은 이에 대해 19세기 말 존 윌리엄 드레이퍼와 앤드루 딕슨 화이트의 책을 통해 갈등적 관계가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답한다.

19세기 계몽주의에 이르러 서구 기독교의 권위와 가르침은 도전을 받았고,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서구의 근대 사상가들은 그 권위의 정당성과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독교는 이에 대해 자체적인 해결방안으로 도덕이나 윤리의 영역, 나아가 역사를 과학이 침범하지 못하는 종교의 영역으로 제시했다. 이후로는 과학과 종교의 길이 갈렸고 과학은 더 이상 복잡한 형이상학적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자연을 대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 후 300, 과학은 놀라운 발전적 성과를 거뒀고, 이제는 우리 문명을 특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에 대해 신재식은 과학자는 이제 성직자의 지위를 가졌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위의 현상은 19세기적 현상이라고 신재식은 분석한다. 20세기에 들어 과학과 종교를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서로의 타자성을 어떻게 극복하는 가에 대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위의 과학자의 왜 종교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일 것이다. 덧붙여 이제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라고 말한다. 그리고 종교학자에게 종교는 무엇이고 과학은 무엇인지를 제시해 줄 수 있는지 새로운 물음을 제기한다.

 

불가지론자이자 종교학자인 김윤성은 3자로서관찰적 입장에 놓여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도킨스의 신이라는 망상이라는 의견은 사실 무신론자의 공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도킨스가 제시한 논의들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 문제에서 주로 제시되어왔던 것인데, 이를 더 확장하고 과도한 정도의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종교를 부정하기에는 애매한 아인슈타인의 종교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 근거중 하나이다.

또한 과학과 종교에는 분명 진리를 둘러싼 나름의 영역이 있지만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많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티븐 제이굴드처럼 깔끔하게 두 영역을 분리하는 것도, 이안 바버나 존 호트처럼 과학과 종교의 대화나 융합을 꿈꾸는 입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들과는 다른 서로 별개이면서도 중첩되는 미묘한 뉘앙스로 가득한 이 관계의 영역을 언젠가는 명확한 인식의 언어로 서술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것이 종교학자 김윤성의 중점적 태도인 것으로 읽힌다. 우리 삶에는 구분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은 복잡하고도 모호한 중첩지대가 무수히 많고 과학과 종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학자로서 기독교 중심의 논의인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되어왔기 때문에 기독교 위주의 논의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좀 더 일반적이 보편적인 용어로 풀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임도 짚어 낸다.

 

이 책의 내용을 무신론자, 유신론자, 불가지론자의 시각으로 정리 해보면 아래와 같다.

무신론자는 과학의 시대를 관통하며 자신의 논리가 보충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종교가 과학의 시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궁금해 한다. 유신론자는 종교가 인식 지평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경험을 했음을 안다. 그 자체에 문제의식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신이 받는 존재론적 의심은 분명 불합리하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가지론자는 신의 유무라는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는 벗어나서, 신 존재의 현실적 필요 등의 보다 객관적인 것들부터 사유를 시작해나가고자 한다. 그렇게 멀리서부터 객관화 해가며 점차 밀접하고 예민한 부분들 까지 엄밀하게 설명할 수 있길 바란다.

 

2.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이 대두한 맥락과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서술하고, 비판적인 과학자와 신학자 두 사람의 입장이 되어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문제점을 논하시오. (핵심어: 사이비과학, 사이비신학) (종교전쟁 4)

 

4한국 교회는 왜 창조과학에 열광할까요?”는 종교학자 김윤성의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진화와 창조문제는 한국 교회에서도 치열하게 논의 되는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김윤성은 이에 대한 과학과 신학의 각 입장을 물으며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영국과 미국의 경우를 예로 설명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세기 초 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등 다난한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의 보수주의 진영은 결집하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근본주의 신앙이 부상하고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에 진화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 되었고 근본주의 진영이 진화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창조론은 진화론에 대척하는 것으로 대두되며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가르치라는 재판들이 속속 펼쳐졌다. 유명한 원숭이 재판의 일화가 소개된다. 원숭이 재판, 즉 스코프스 재판의 실질적 의의는 진화론이 창조론을 이긴 것이라기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을 알린 것에 있는 듯하다. 교육계와 교과서 출판업체들은 이 이후 진화론을 껄끄럽게 여겨 잘 다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를 계기로 미국의 진화론 교육금지법은 폐지되기 시작했다. 이에 근본주의 진형은 창조론을 교과서에 싣기 위해 창조 과학을 내놓고 교실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 소송을 겪고,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최종판결을 받게 되었다.

창조론 진영이 다시 해결책을 모색해 내놓은 것이 바로 지적 설계론이다. 이는 창조라는 단어, 종교적 색채를 최대한 배제하며 자연 뒤에는 설계자인 지적 행위자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소송은 2005년 펜실베니아 주에서 벌어진 것이다. 지적 설계론이 담긴 교과서를 사용하게 하는 정책이 강행되자 소송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지적 설계론은 결과적으로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적 설계론은 미국의 전 대통령 부시를 비롯, 정계 등 많은 인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미국·영국인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국립 대학원 카이스트에도 한국 창조과학회가 설립한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해 김윤성은 문제를 제기하며, “한국 사회에서 창조과학은 어째서 용인되는 가?”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해 과학자 장대익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은 틀린 것조차 아닌 사이비 과학이라 비판한다. 이를 비판적 과학자의 입장으로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다윈의 블랙박스를 통해서 현대 진화론이 세포의 진화조차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성급한 신학적 변증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마이클 비히는 동료 연구자들에게 어떤 학문적 피드백도 받지 않아 과학계 안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또한 신학계도 비히가 성급했음을 느끼며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이는 창조 과학진영의 취약점이다.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 윌리엄 뎀스키는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수학, 철학, 신학 학위를 가진 신세대 논객이다. 그는 자연적으로 생긴 복잡성을 능가하는 다른 종류의 복잡성이 존재하고, 이는 설계 추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서 뎀스키는 확률 이론과 정보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보다 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그의 주장 또한 작위적이라는 비판 안에 있다. 게다가 그가 DI(Discover Institute)의 소속인 것은 그가 DI의 핵심 목표인 유물론적 설명을 유신론적 이해로 대체하고자 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는 그의 추론이 객관성을 갖기 어려운 동기가 될 것이다.

이런 지적 설계론 운동은 지난 동안 창조론을 대중의 관심 속으로 끌고 왔고, 논쟁을 무신론 vs 유신론의 구도로 확장시켰고, 보수 엘리트세력을 규합했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공교육 침투를 위한 법적 투쟁을 지속해왔다. 그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미국 51개 주 가운데 진화론 수업을 줄여야 한다든지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주는 무려 31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그리고 영국의 약한 경향)이 있지만, 여전히 과학계는 지적 설계론은 과학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며 우려한다. 지적 설계론은 흥행몰이에는 성공했지만, 사실 이는 종교적·정치적 수사일 뿐 결코 과학계의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다. 장대익은 이에 대해 지적 설계론의 기본 전략으로 논쟁의 구성 방식 두 가지를 함께 정리한다. 진화론을 오용하고, 이에 대해 과학자들이 대꾸하면 논쟁이 있음을 강조하거나, 진화론 내부의 진짜 논쟁들을 부풀려 진화론을 격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검증이 가능 한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히 짚는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사이비 과학의 증표가 된다고 말한다. 비판적 과학자로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진정한 과학이지 못한 이유를 밝힌 것이다.

 

반면 비판적 신학자의 입장에 서있는 신학자 신재식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은 사이비 신학이라고 우려섞인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먼저 신재식은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임을 밝히며, 유신론적 진화론의 의도가 과학으로 보이기 위함임을 짚어내며 자신은 진화론적 유신론자라고 소개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건 실제로 과학적측면을 강조하고 싶은 창조 과학계나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이분법 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창조 과학계는 창조와 진화를 이분화해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비판의 첫째 지점이다.

이 이분법 적 흑백논리는 진화론이 오류가나면 창조론이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되는 것처럼 사고하게 하는데, 이것은 분명하게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이는 종교 자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것이다.

둘째로는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음을 짚어낸다. 창조과학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피해의식과 두려움 때문인데, 이런 태도는 과학을 신앙의 토대로 삼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기반인 과학이 무너지면 신앙이 함께 무너지기 때문에 위험하다며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적 신학자인 신재식은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셋째로는 신학적 차원의 문제이다. 명시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창조과학은 성서 해석을 문자 주의적으로 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성서의 메시지를 상당 부분 왜곡한다. 또한 이는 뿐만 아니라 신학 작업에서도 문제가 된다. 신학은 성서 이외에도 전통, 경험, 이성 등을 그 자원으로 삼는데 창조과학이 강조하고 다루는 것은 오로지 성서, 그 중에서도 창세기 뿐 이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과학계가 신학적 주장을 적절한 방식으로 다룰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왜곡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도 신재식은 말한다. 또한 기독교의 신은 태초의 창조 뿐 아니라 계속 창조하며, 궁극적 창조까지 함께 가는 역동적인 신이기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태초의 창조만을 관심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 후에 신재식은 처음의 물음 왜 한국 교회는 창조 과학에 환호하는가?”에 대해도 답한다. 이는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전통 때문이며, 한국은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별 차이가 없는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 토양이 창조 과학을 받아드리기 쉬운 처지에 놓인데다가 신학과정의 교육도 문제라고 말한다. 자연 과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은 제도적인 문제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 독재 시절 등의 억압적 요인 때문에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성서 비평의 힘은 물론 과학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힘도 약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러나 생명과 세계는 여러 수준의 게층적 설명 방식의 상보적 해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으로 신학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신재식은 끝으로 주장한다. 건강한 교회와 신학을 기대하면서 지적 설계론과 창조과학이라는 온실에서 빠져나와 신학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더 굳건해 져야 할 것이다.

 

 

 

 

 

3. <종교전쟁> 2부의 핵심 내용을 요약정리하고,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이런 논의가 지닌 의의는 무엇인지 논하시오.

 

2다시 과학이 종교에게_과학, 종교를 해부할 수 있을까요?”에서는 1부를 지나 두 신학자와 과학자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면서 시작된다. 먼저 신학자 신재식은 과학기술이 경외감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 윌슨과 같은 진화론자가 제시한 종교와의 관계모형은 과학의 우월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비판,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공존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물음, 어째서 이 물음을 하고 있는 것은 유독 기독교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어 과학자 장대익은 종교가 어떻게 과학자에게 무의미한 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도의 합리성이나 밈이론, 종교 적응론, 종교 부산물론 등을 소개한다. 종교학자 김윤성은 이 물음에 대답하거나 문제제기를 조금 더 정교화 하는 시도를 한다. 각 내용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조금 요약하겠다.

먼저 경외와 누미노제에 대한 것이 이야기되었다. 신재식은 남미의 자연경관들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것을 과학적 사고가 방해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윤성은 누미노제개념과 신비경험을 소개하며 이 누미노제의 경험이나 신비경험이 종교 경험의 한 가치유형일 수 있고 이 감동의 경험은 자연과 신에 대한 찬미라는 두 극단 사이에 두루 걸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경외를 느끼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임을 이는 특정 신과 반드시 관계있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경외에 대해 보다 명확히 이해 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 화두로 신재식은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 대해 말한다. 윌슨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와 과학이 함께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이 안에는 윌슨의 자연을 바라보는 경외심이 분명히 들어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의 화해가 가능한 부분을 윌슨이 제안한 걸까? 그러나 신재식은 윌슨이 결국 주장하는 것은 과학생물학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종교계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 듯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감동적 호소에 감춰진 일방주의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윤성도 의견이 같다. 소통이 없음. 손을 잡자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일방주의라는 것은 그 소통이 한계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학중심주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기독교 신학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오던 청지기정신을 과학자 자신의 것 인 듯 소개하는 모습은 일종의 표절이다. 나아가 김윤성은 윌슨이 미국사회에서 근본주의 종교계의 모습에 너무 예민하게 받아드려 미국 사회 일반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도 제기한다. 이는 종교와 과학이 생태주의를 어떻게 함께 다루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함께 다루는 것이 적합하며,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으로, 범 학문적으로 함께 다루며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어느 한 학계의 오만의 태도가 존재할 필요는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기독교가 더 과학과 종교의 관계 논의에 유난인 이유에 대해 신재식은 기독교가 담론의 위상변화를 경험한 (거의)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김윤성은 이를 한국의 종교지형도에 적용하여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함께 살핀다. 종교에 대한 억압정책들을 이겨내려는 시도가 먼저였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곳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과학이 서구 근대화의 산물인 것도 둘 간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두 학자의 역사적 분석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과학자가 제기한 가장 큰 문제 제기는 기적이나 기도 등은 객관적으로 실체도 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소개하고자 밈이론을 제기하는데 본인은 이 밈 이론에는 한계가 많다고 느끼기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밈 이론은 하나의 문화현상이 생물체처럼 자기 복제나 증식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화현상을 과학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설명해보고자 한 것뿐일 수 있다. 문화를 설명하는 데에는 과학적 언어보다 문화적 언어가 더 큰 효용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장대익은 과학이 이해하는 종교에 대해인간 마음이 적응한 과정이거나 다른 인지 적응들의 부산물인 것으로 이해하는 두 관점을 더 소개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종교가 어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의 바이러스인 으로의 종교를 더 이야기하면서 1부의 논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종교가 이 이후의 인류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 같다는 것이 그 중심논지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종교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독점을 풀라.”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제 종교가 독점하던 윤리, 도덕, 가치와 의미는 다른 과학의 서술로도 대체될 수 있으니 더 이상 독점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주장에 대한 온도 차이는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김윤성은 첫째로 기도나 기적은 효과의 문제가 아닌 의미의 문제였음을 밝힌다. 여기에 더해 종교에는 신념이나 세계관·가치로 이해되는 것 뿐 아닌 몸짓으로 이해되는 의례적 실천의 차원과 공동체와 결합해있는 사회적 차원이 있음을 소개한다. 즉 기도나 기적도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몸과 실천의 차원을 갖고, 공동체 안의 사회적 차원을 갖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의미의 영역은 종교만의 독점 요소는 아님도 이야기한다. 이는 과학의 언어로도, 예술의 언어로도, 과학의 언어로도 자유롭게 이야기 될 수 있으며 이는 고갈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김윤성의 서술에 이제 가치와 의미에 대한 독점적 인식을 종교가 하지 않을 테니 과학도 자유롭게 이 논의를 하며,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싶다. 또 종교의 세 차원에 대해 종교학적인 분석이 무신론적 과학자와 공유되어 더 폭넓은 상호이해가 가능해졌음이 기쁘다. 밈이론을 통해 문화를 설명코자 하는 과학자의 생각이 또 함께 공유되어 논의되는 것도 중요한 일임에 기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도 언급되듯이 어떤 우월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서구적 근대성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근대의 자본의 논리와 과학이 만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자 하고 갖게 되었음을 아는 일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비서구의 과학논의, 비 서구의 종교적 이해는 더 큰 배척을 경험하며 인류사에 정상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차별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위의 논의들은 이런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6. 인공지능, 트랜스휴머니즘, 이미지테크놀로지 등이 왜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반성적 사유를 요청하는지 논하시오. (인공지능 논문, 이진우 책)

 

이를 논하기 위해 이진우의 테크노 인문학중 서론 인문학과 과학기술, 그 융합적 사고의 힘을 중심 논지로 삼겠다. 1인간학적 기계: , 미디어 그리고 상상력은 이에 대해 소개할 논리가 길지 않다.

서론 인문학과 과학기술, 그 융합적 사고의 힘에서 철학자 이진우는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며 서술한다. 인류의 삶에서 기술은 점차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 역사적 맥락이다.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도구는 그 맥락안에서 인간에게 권력의 열쇠를 주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는 점차 복잡해지고 정교해진 21세기의 테크놀로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과 기술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독자적 논리를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힘으로 군림하고 있다. 아이폰을 비롯한 핸드폰의 진화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핸드폰이라는 도구를 갖거나 갖지 않는 것이 인간의 능력을 변화시키기 충분하다고 광고가 되고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은 그 과학 기술이 개개인에게 모종의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이테크놀로지 의료기술는 인간의 몸을 지배할 수 있으니 보다 노골적으로 권력적 도구 그 자체이다.

이진우는 나아가 이와 같은 사고의 흐름을 3가지 단계로 정리한다. 첫째는 20세기 기술 우호적 태도가 확산되던 시기, 둘째는 인간과 기계는 대리할 수 도 있다는 의식이 발생하던 시기, 셋째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는 데에 기계의 발전을, 기계와 같이 살아갈 인간의 인간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휴머니즘의 자기수정시대. 과학이 신의 위상을 대체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기술의 진화는 인간의 생명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인식되며 진화론적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인간다움의 영역에서 까지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다움의 영역에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과학기술 사회가 분명 인문학과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음을 뜻한다고 이진우는 주장한다.

첫 번 째 시대에는 기술적 상상력이 필요했고, 두 번째 시대의 사회 제도나 사회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수준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했던 반면 세 번째 시대에는 과학기술이 가진 사악한 복잡성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예측 불가능성”,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개념으로는 위험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해진 것은 가장 근간에 있는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책의 1인간학적 기계: , 미디어 그리고 상상력에서는 이런 인문학과 상상이 인류에게 기초적임을 증명한다.

 

이 세 번째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은 휴머니즘에 대해 고도로 발달된 기술사회 테크놀로지사회에서의 새로운 휴머니즘을 고민할 수 있는 보다 고차원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진우는 책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이라 명했다. 그리고 그 트랜스휴머니즘의 지향으로 첫 째, 인간 조건의 근본적 개선에 대한 지적 문화적 이해, 둘째, 테크놀로지 개발의 윤리적 문제 이해, 셋째 기술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전혀 다른 부분에 대한- 늙어가는 것, 죽음의 불가피성조차 극복해가는-에 대한, 이전까지는 경험 없던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이런 주장에 완전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이를 김윤성의 <인공지능과 영혼>이라는 논고에 접목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고는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들을 분석 서술해놓은 것인데 인공지능의 개채들이 영혼과 같은 무엇을 가지면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 말한다. 인간다움의 의식이 진화되며 죽음을 인식하는 인공지능의 모습은 인간성에 대한 지도를 펼쳐보여 주는 듯 하다. 영화들이 던져주는 이와 같은 영혼을 가진 인공지능과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인 것을 뛰어넘은 상상은 이진우가 소개하는 테크노인문학을 완전하게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영화 A.I를 그 예로 조금 더 이야기 하겠다. 영화 A.I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인류가 자연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면서 로봇즉 자신의 도구를 자신과 닮은 것으로 만들어 인류를 보존하고 이어가는 역할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공적인 로봇 데이빗은 사랑의 감정과 상상의 행위를 하며 모종의 인간성을 갖는데 까지 성공한다. 그리고 육체적 한계조차 뛰어넘어 인류의 멸망 이후 인간성을 간직한 유일한 존재가 된다. 이 과정까지 갔기에 인간의 도구사용은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도 보여주듯 이 과정까지 가는 데에 사실 보다 선행한 것은 인간성에 대핸 혼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 보여 지는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은 분명하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로봇과 인류의 전쟁을 테마로 한 영화들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가?

울리히벡의 말대로, 이진우의 말대로 수준3의 기계와의 관계에서의 복잡성. 더 전문화 된 사회의 더 큰 위험은 인간의 손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놓인다는 것은 정언명제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손쓸 도리 없던 재앙이다. 그렇지만 더 끔찍한 일은 앞으로 계속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물결을, 기계의 제작을 막아내는 일은 과학 스스로 결코 할 수 없다. 지금의 수준에서 도구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은 인간이, ‘인문학적으로, ‘종교가 대표하고 있는 윤리도덕의 영역에서 선행되거나 발 빠르게 뒤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인문학과 과학 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반성적 사고는 트랜스휴머니즘안에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분명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도구를 생각하며 행동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서 다뤄야 하는 건 인간성을 지닌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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