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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ology

<religion and science> middle exam, 2014

by Sociology/ FPE S.jeanne 2016. 11. 24.

<religion and science> middle exam, 2014

prof. Yoon-sung Kim

Answer by Hanee choi




1. 다음 용어들의 뜻을 간단히 비교 설명하시오. (호트 책 여기저기)

 

(1-1) 방법으로서 과학 vs. 이데올로기로서 과학주의

방법으로서 과학은 사물의 실재를 이해하는 데에 과학적 방법인 관찰과 실험, 가설과 검증, 변인통제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의 순수한 기능을 명시한다. 반면 이데올로기로서 과학주의는 과학을 실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모습을 뜻한다. 이들이 과학에 부과하는 권위는 이미 신념체계인 듯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다.

 

(1-2)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vs.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자연신학이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신의 존재나 신의 은총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19세기 초 자연신학을 쓴 윌리엄 페일리는 땅위에 떨어진 복잡한 시계의 원리를 알아본 것이 곧 신의 설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도킨스와 같은 과학적 회의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반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리론자들과 접촉주의자들은-호트의 분리유형에 따른, 자연신학을 역사적으로 종교의 권위를 떨어트린 것으로 보며 비판한다.

자연의 신학은 자연신학과는 달리 종교와 과학의 관계유형에서 접촉이나 지지로 분리될 수 있는 신학적입장이다. 이는 과거의 인간중심의 신학에서 새로운 우주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연을 포괄하는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 예로Toward a Theology of Nature에서 울프하트 판넬버그는 실재의 최심층에 신적 신실성이 있음이 과학적 예측을 지속하게 함을 이야기한다.

 

(1-3) 진화론적 유신론 vs. 유신론적 진화론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론을 현재까지 생명 현상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과학적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신학적 입장이다. 진화론을 받아드리고 진화의 과정이 신의 인간창조의 과정중 하나라고 인정하는 이 입장은 호트의 분류에 의하면 갈등-융합에 가깝다.

반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융합에 대해 비판하는 분리-접촉입장에 가까운데, 이들은 아예 창조교리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지양한다는 것이 진화론적 유신론과의 차이이다. 이 유신론적 진화론의 목적은 과학과 종교의 건전한 대화를 통한 상호발전을 위해 진화론과 신학을 논의하는 것에 있다.

 

 

선택 서술형 문제 (3문항 선택) (10~15) (15× 3문항 = 45)

 

2. 생명이 화학으로 환원 가능한지에 대한 갈등, 분리, 접촉 입장의 견해가 무엇인지 비교 서술하시오. (호트 제4)

호트의 소개하는 생명이 화학으로 환원가능한가에 대한 갈등적 입장은 형이상학적 환원주의자들의 의견이다.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란 방법론적 환원과는 달리 과학적 유물론에 가까우며 순수과학이 제공하는 것 이외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갈등적 입장의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물리학, 진화이론, 생물학이 화학의 방법을 채택함을 근거로 인간의 의식과 사회의 모습까지도 과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유신론적 종교나 신비적 힘은 설 자리가 전혀 없으며 사회생물학적으로 종교는 새롭게 과학적 유물론 안에서 이해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호트가 소개하는 분리론자들은 환원주의자들의 변론이 일정부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반론한다.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는 겸손한 희구에서 나오는 순수한 과학이 아니라 과학과 융합된 신념체계라는 지적이 그들의 갈등론자들에 대한 중심 비판이다.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과학과 종교사에가 아니라 환원주의와 종교적 믿음이라는 두 신념체계들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론자들은 종교는 종교의 본질에 충실하고, 과학은 과학의 본질에 충실하여 어떠한 융합이나 갈등을 피하고자 한다. 그들은 신적 신비는 자연에 속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과학적 노력이 밝히는 것이 있지만, 사물의 심층적 실체와 접촉할 수 있는 다른 앎의 방식중 하나가 종교라는 것이다.

반면 접촉입장은 형이상학적 환원주의가 신념체계이며 과학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분리론자들의 의견과 같지만 생명과 마음이 화학적 법칙과 과정에 물리적으로 속해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과학이 생명, 마음, 영혼과 그 화학적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게 만들었음을 높이 산다. 이를 통해 신학이 인간의 자연 의존적임에 대한 겸손함, 신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기반한 새로운 고찰 그리고 뇌의 화학적 작용과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의문 등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3. 우주가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갈등, 분리, 접촉 입장의 견해가 무엇인지 비교 서술하시오. (호트 제5)

빅뱅이론 이후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신학적 창조론을 뒷받침 할 법한 과학이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호트가 정리한 갈등, 분리, 접촉 입장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갈등 입장의 두 부류는 빅뱅이론이 창조신학을 완전히 지지하는 신학자들과 기독교인 그리고 과학적 회의론자들이다. 창세기가 새로운 우주론에서 결정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새로운 우주론이 종교적 창조론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과학적 회의론자들의 갈등은 명백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분리입장의 다른 신학자들은 창조신학과 우주론이 융합되는 것은 오히려 종교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며 분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창조신학의 골자는 연대기적 시작이 아닌 신에 대한 존재론적 의존성에 관한 것이고 우주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이끄는 것이 그 역할임을 강조하며 융합을 거부한다.

접촉론자들도 분리론자들의 자연신학과 같은 길을 가는 융합에 대한 우려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빅뱅이론이 신학과 무관할 수도 없음을 주장한다. 우주의 새로운 과학적 조망이 그들의 가장 오래된 존재에 대한 질문을 회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접촉론자들은 과학과 신학은 이제 함께 이 우주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끝으로 그들은 인간은 영원히 기원의 문제를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인간 본질의 문제도 함께 제기한다.

 

4. 강한 인류원리란 무엇이며, 이에 대한 갈등, 분리, 접촉 입장의 견해가 무엇인지 비교 서술하시오. (호트 제6)

5. 자연에 존재하는 복잡성에 대한 갈등, 분리, 접촉 입장의 견해가 무엇인지 비교 서술하시오. (호트 제7)

 

6. 종교비판자들(갈등입장)이 기독교가 생태위기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비판에 대한 분리와 접촉 입장에서의 기독교계의 답변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호트 제9)

호트는 과학적 회의론자들이 기독교가 건강한 생태적 관심을 불필요하게 흐트러트리거나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종교와 과학의 갈등입장으로 소개한다. 이 과학적 회의론자들 중 몇몇은 종교가 생태적 도덕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 공동체가 생태운동에 참여하는 것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환영한다. 그러나 이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지금의 생태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하는 기독교일반이라는 비판이다. 성서가 땅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부여한 오만함이 자연을 남용하도록 종교적으로 허용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생태위기의 문제를 인식하고 촉구하는 것은 순수한 자연주의자들이라고 얘기한다. 자연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이해관계가 없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회의론자들이 종교의 환상에서 보다 더 본질적인 생태윤리의 기초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의견이 분리입장에서 소개된다. 이들은 갈등론자들의 성서해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성서는 인간에게 청지기직을 담당하기를 격려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회의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중심주의적 문제에는 일면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종교가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본주의로 인해 강화된 것임을 주장한다. 즉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 생태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초월세계만을 중시하는 종교적 저세상주의(other-worldliness) 때문이 아니라 너무 심한 이세상주의(this-worldiness)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논은 접촉입장에서 소개된다. 이 접촉주의 입장의 사람들은 분리접근법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이 고전적 종교적 세계관을 옹호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 생태학이 가져온 인식의 전환을 신학적 갱신의 기회로 이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종교개념의 다수가 생태적으로 모호하며, 그간에 무지했음을 인정하고 생태적으로 민감한 우주론으로의 개정을 강구하길 주장한다. 또한 새 과학적 토대는 점점 더 마음과 자연의 분리 불능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짚으며 갈등론자들이 비판한 종교의 우주에 집 없음관념을 더 이상 신학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들의 (수정된)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자연세계는 더 이상 다음세계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시험장이 아니며 우주의 전체 진화가 미래완성의 징표이다.

 

 

 

 

 

필수 논술형 문제 (20~25) (20× 2문항 = 40)

 

7. 존 호트가 구분한 종교와 과학의 네 가지 관계 유형에 관해 그 주요 내용을 서술하고, 과학이 과연 인격적 신을 부인하는지에 대한 이 네 가지 입장 각각의 주장은 무엇인지 서술한 뒤에, 이러한 논쟁이 지닌 의의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해보시오. (호트 제1장과 제2)

존 호트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 첫째는 갈등이다. 이 관계유형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그룹은 성서문자주의와 보수적 종교인들 그리고 과학적 회의론자들 등이다. 책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은 과학적 회의론자들인데 이들은 과학은 유신론적 종교와 양립가능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반면 보수적 종교인들은 과학이 우주에서 진정한의미를 앗아갔다고 주장한다.

둘째 유형은 분리이다. 이들은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명쾌하게 나누어놓고 갈등을 피한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융합될 수 없는 실재를 이해하는 완전히 독립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분리접근법은 종교의 적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사물을 바라보는 유일하게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임을 밝힌다.

셋째 유형은 접촉이다. 이는 갈등을 피하는 데에서 나아가 종교와 과학의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 관계유형에서는 종교는 과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의 우주론은 신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목한다.

넷째 유형은 지지이다. 이 지지의 유형은 접촉에서 보다 종교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호트의 시도인 듯 하다. 이 유형은 과학자들의 실재에 대한 탐구와 실재의 일관성에 대한 신뢰를 지지하는 것을 보다 명확한 종교의 역할로 본다.

호트는 이어서 구체적인 사안들을 짚어내는데 먼저 인격신의 존재유무와 과학의 대립을 풀어내려 한다. 왜 인격신교는 유난히 과학과 대립하는가? 과학은 인격적 신을 부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각 유형별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갈등유형에 속하는 회의론자들은 과학은 인격신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에 대한 개념을 정교화 할수록 그것은 더 반론의 여지가 커지며 무의미해진다는 입장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을 물리학의 장치들로 관찰하면 그 안에는 비인격적인 우주의 중립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분리론자들은 회의주의자들이 과학주의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며 종교적 경험은 과학주의의 경험적 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전통적으로, 또 여전히 실재하는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셋째로 접촉주의자들은 인격신에 대한 개념에 과학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먼저 받아드린다. 그리곤 과거의 개념보다 더 폭이 넓은 수준의 인격신, 우주전체에 관심이 있는 인격신으로 신학적 개념을 수정한다. 또한 기존의 종교적 확신과 새로운 물리학이 맞물린다는 사실도 거론한다. 끝으로 지지의 입장에서는 이를 넘어 과학이 진리를 추구할 에너지를 공급해준 것이 다름 아닌 종교라는 것을 역설한다. 인격신이 주는 신뢰성은 자연의 신뢰성으로 이어지고 이런 믿음이 과학을 지탱하는 믿음과 신뢰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비로소 신학자들의, 종교의 시각에 우주 전체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과학과의 중요한 교류를 통해서인 듯 하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굉장히 의의있는 일이다. 보다 더 넓은 사고를 하며 신의 존재와 신의 의미, 신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낳게 될 것이다. 생태주의를 통해 청지기적 역할이 보다 명백해 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격신이 주는 신뢰성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약하고 모호해 보인다. 이에 대해 물리적, 생물학적, 화학적, 우주론적인 설명을 더 하지 않더라도 더 깊은 부연과 더 명백한 해석은 필요하다. 이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서 과학 혹은 기존의 신학만이 중심이 되는 과학-종교 중심주의적 풍토라고 본인은 해석한다. 따라서 과학과의 관계를 바라볼 때에도 종교는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또 과학의 이전에 존재하던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또 사회적인 인식을 함께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8. 무신론자들(갈등입장)이 현대과학의 진화론과 우주론을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이며, 이에 대한 기독교계의 분리와 접촉 입장에서의 답변은 무엇인지 서술하고, 이러한 논쟁이 지닌 의의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해보시오. (호트 제3장과 제8)

 

갈등입장의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의 우연, 생존을 위한 투쟁의 냉혹성, 비인격적인 자연선택의 무심함이 기독교의 관심 갖는신과 무관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빅뱅우주론을 비롯한 우주론은 창조론을 보조하는 것으로 기독교일반에서 환호하지만, 과학적 회의론자들은 이에 대해도 반기를 든다. 결정적으로 우주에 목적 없음, 무관심한 우주는 목적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주적 비관론조차도 가장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종교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이와 같은 근거는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런 진화론의 문제에 대해 분리론자들은 먼저 창조주의와 진화론적 유물론자를 모두 비판하며 인간존재의 핵심은 과학적 이해를 벗어나있음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우연, 생존을 위한 투쟁의 냉혹성, 비인격적인 측면은 신의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속성, 종교가 항상 고민해온 악의 근원적 문제, 자연자체는 신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음을 들어 관계없음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접촉주의자들은 일부를 긍정하지만 진화론을 통해 신의 모습을 모험적이고 사랑이 많은, 우연과 창조를 해낼 수 있는 방황을 감싸는 보다 너그러운 존재로 새롭게 인식하기를 재고한다.

우주의 목적성을 신이 존재하지 않음에 증거로 여기는 갈등론자들에 대해서 분리론자들은 이는 과학적 방법, 과학 자체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과학이 우주적 비관론과 결합하는 것 또한 과학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들은 목적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종교의 임무이며 우주가 단지 유물론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과학적 관찰의 필연적 결과 또한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접촉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개념들이 우주의 목적에 대한 종교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나 신은 이 의의를 통해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풍부해질 것임을 제기한다. 그리고 우주가 시작점을 가진다는 것으로도 종교적 목적에는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예측 불가능한 우주의 미래에 대한 지평이 열렸고 이를 통해 강제적이지 않고 설득적인, 부드럽게 이끌어나가는 창조적인 신을 만나며 신학이 보다 풍요로워질 것임을 주장한다.

 

이처럼 진화론과 새로운 우주론을 통해 기존의 보수적이던 신학적 해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신에 대한 이해는 보다 유연해 졌다. 긴밀히 관계하는 엄격한 신에서 부드럽고 유연한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다. 신학은 성서에 묶여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이해에 따라 과학적 이해에 따라 그 근본을 잃지 않는 선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정제해야한다. 그럼으로써 종교는 비로소 지속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과학과 종교의 위와 같은 갈등과 분리의 시도, 그리고 접촉으로의 관계 발전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의 변화에 종속적으로 또 그 뒤편에서 걸음을 따라가며 종교가 변화하고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이 사고의 흐름을 앞서가지는 못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신학이 사고의 흐름에서 먼저 앞서나가야 할 다른 사회적 인문학적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에 그랬듯 오히려 과학을 인도해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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