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ltural Study/Films

[영화 평] 김보라, 2018, <벌새>

by S.jeanne 2019. 9. 19.

[약 스포 주의, 잡글 주의]

 

김보라 감독이 2018년 부산영화제에서 보였던 <벌새>가 개봉했다. 왜 제목이 벌새일까? 살면서 벌새를 본일은 없다 싶을만큼, 존재도 크기도 작은 미물. 날개를 분에 몇천번이고 휘두드며 몸을 띄운다 했던가.

영화는 지루하리만치 미세하게 흘러갔다. 나는 그 미묘함들에 소름이 끼쳤지만, 함께 본 이는 때로 졸음이 왔다한다. 웃기게도 내가 졸음이 왔던 영화는 2012년 개봉한 버전의 <레미제라블>이었다. 그 시끄러운 소음들과 웅장한 노래들 속에서 지루하다 되뇌었던 반면 이번 영화 <벌새>에서는 주인공이 마이크를 드는 순간, 입을 4cm정도 위에 가져대는 순간, 숨을 떼는 순간까지 집중했고. 집중해봤자 알수 있는거라던가, 느낄수 있는것이라던가, 변화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래 어쩌면, 생애감. 그것들이 차올랐다.

석사생활을 시작하고 영화란 것을 몇 번 찾아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굳이 영화를 봤노라 글을 남기는 것은. 그 생애감에 대한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해 조금은 적어놓고 싶기 때문이다. 저출산, 학벌 세습, 한일관계, 남북통일, 에너지 전환, 환경문제 여전히 이 사회는 역동하고 있다. 특히 '이 사회'의 근현대사 전반에 깔린 압축됨과 터져나옴은 여러 재난영화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블록버스터들을 남겼다.

이 역동에 대한 감각은 지금의 386, 베이비 부머 세대의, 지금의 청년층의 부모세대의 핏속에 여전히 뜨겁게 흐르는데. 너(one)는 뉘의 편이고, 너(another one)는 뉘의 편인지를 가르는 것이나. 논리, 흐름을 이해하고 입장을 또렷히 밝히는 것이, 그들의 생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혼란했고, 그들이 상상하거나, 꿈꾸는 것들은 언어가 되지 않으면 교환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민주화운동의 열망이나, 경제 성장의 열망을 경험한(심지어 간직한) 윗 세대들이 지금의 자식뻘되는 세대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계속 궁금해 하는 몇 가지는, "대체 왜 우경화되는가?", "너희 안에 진보는 살아 있는가?", "아이를 대체 왜 낳지 않는가?"등인 것 같다. 그 질문들을 과감히"너희는 살아가고는 있는가?"로 요약해 볼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어떤 소통의 부재, 그보다 그 저변에 깔린 소통을 방해하는 생애감에의 변화로 이해한다. 그리고 영화 벌새는 그 생애감의 변화를 참-진하게 보였다. ⠀

일본의 우경화가 한국 사회학계에서는 벌써 몇년전부터 논의되었고, 한국도 그를 닮아간다는 이야기들이 나온것도 내가 대학을 시작하던 2010년대 초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 영화처럼, 지루하리만큼 잔잔하게, 미세하게 하나의 개인을 따라다니는 렌즈가 한국에서도 들여다보아진다. 이것이 우경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각각 한국에서는 어떻고 일본에서는 어떤 현상인건지를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모른다.) (1)

다만, 우리의 삶은 참 그렇게 별일없이 살아진다.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보아질수도 없겠지만, 살아있기 위해 해야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사회의 주류화된 갈등으로 포착되거나 모아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스스로, 혹은 어떤 관성들에 의해 이런 숨쉬기 운동은 가치가 없다고 치부 되는 걸지 모른다. 내(I)가 네(I)편인지, 내(I)편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공감능력이라는 것이나, 생의 욕구같은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는 낳으면 마을이 키운다거나, 사회가 키운다거나, 저절로 큰다고 하는 386세대의 말은 갈수록 전혀 와닿지 않는다. 지금의 혼란한 생애감을 가진 세대에게 출산이란 하나의 카오스를 외따로이 캄캄한 "공간(空間)"에 내놓는 일로 보이기 때문에.

 

 



a#graudate's #shit, #영화 #김보라감독 #벌새, 보고 쓴 #잡글 #에세이 #self #recording 기록화작업


(1) 벌새는 또 그 배경을 '1994년'이라고 하는 뚜렷한 시간지표를 두고, '성수대교 붕괴'라고 하는 뚜렷한 사건을 두고있다는 점에서 영화만으로는 그 역사적, 사건적 배경을 알기 어려운 일본 영화들 <카모메 식당>이나, <아무도 모른다> 등등과 같은 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여전히 사건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지점이 한국사회에 남은 역동성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초점은 지극히 미세하게 "벌새"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그 생애감이 개별화 되어감을 보인다.

'Cultural Study > Film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산티아고  (0) 2016.08.01
the wailing :곡성(2016) 그리고 the birlds(1963)  (0) 2016.06.06
The Name Of The Rose, 1986  (0) 2016.01.26
The lobster  (0) 2016.01.19
Sense and Sensibility, 1995  (0) 2016.01.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