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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Study/Films

the wailing :곡성(2016) 그리고 the birlds(1963)

by S.jeanne 2016. 6. 6.

<영화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시작부터 새는 울고 1분 55초 첫 씬이 시작될 때까지 까마귀는 난다.

캘리포니아 거리를 걷는 멜라니(티피 해드런)는 소리의 와중에 있다.


- 히치콕, 새 (1963)



빗소리와 함께 시작된 곡성은 마을을 지배한다.

그 곡성의 한 가운데 주인공 종구(곽도원)이 있다.

그리고 그 곡성의 영문은 주인공도, 관객도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알 수 없다.



영화로 이야기하는 나의 주제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공포'


강남역 살인 사건이후에 나는 몹쓸 공포감에 하루하루 시달리고 있었다. 회사가 끝나면 강남역 9번출구를 올라 삭막하기 그지없는 가벽으로 둘러쌓인 강의실에 앉아 3시간을 버틴다. 하루는 울음을 삼켜가며 수업을 들은 날 도 있다. 수업이 끝나면 강남의 작은 골목을 지나 뛰다싶이 강남역을 빠져나간다. 내 귓가엔 곡성이 들린다. 운다. 누군가 울고있다. 소녀의 울음일까, 그 소녀의 죽음에 함께 터져나온 여인들의 울음일까? 나의 울음일까. 이 땅은 더럽혀졌다. 마치 영화 <곡성> 안의 곡성처럼.  벗어나야한다는 본능이 내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요즘.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우연히 생긴 표에 곡성을 보러갔다. 공포물은 정말 잘 보지 못하는 주제에 나홍진 감독의 오랜만의 영화, 게다가 공짜표를 외면하지 못했다. 곡성은 영화 구성이 꽉짜여 한시도 관객을 놓아주지 않아 무척 힘이 들었지만 영화관을 나오며 다시 날 둘러싼 것은 영화에의 무서움이 아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감. 절대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어떤 '샤먼'적인 두려움은 느닷없이 현실에 도래했다.



공포영화장르의 창시자.. 서스펜스의 아버지(?) 히치콕의 <새>는 현실적인 어떤 존재가 '두려운'존재로 아무런 이유 없이 바뀌었을때 오는 강한 공포감을 잘 보여준다. 곡성에서 그 어떤 이유도 없이 마을의 사람들이 끔찍한 좀비가 되는 것도 공포영화의 아주 흔한 오마주인 것이다. '알 수 없음.' 그리고 그런 어떤 사건의 본질과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오는 공포.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어떤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사자가 되어버린 곽도원과 같은 허망함이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피의자인지 알 수 없는 혼란함이다.



who are you?

what are you?

where did you come from?

(히치콕, '새'에서 멜라니에게 돌아온 대사)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부연할 말도 많지만 두려움 속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내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어서 마무리하고 나는 이 공포를 빠져나갈 것이다.


히치콕의 새와 나홍진의 곡성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방식이 너무도 흡사하다. 어떤 오마주이거나 공포라는 것의 일반적인 형태가 그러한 가보다. 그렇지만 둘의 결말은 완전히 다르다. '새'의 마지막 씬 멜라니는 새로 지배당한 공포의 공간을 빠져나간다. 반면 곽도원은첫 씬과 같은 공간, 그의 집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결말을 맞는다. 둘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니, 나는 이런 공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무얼 해야하는가?


끼워맞추는 것 이지만. 멜라니는 마지막 그 마을을 벗어나며 아무도 헤치지 않은 love birds 와 함께 나간다. 두 영화에 공통으로 출연하는 '소녀'는 자신이 선물 받은 잉꼬를 아무도 헤치지 않았다며 데려가겠노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용인하며 어떤 잠정적인 위험(누군가에겐 극심한 공포)를 그 이후의 시공으로 함께 데려간다. 곡성에서 곽도원과 그 딸이 정말 '의심을 품어서' 그런 흉한 일을 당한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곽도원은 그 어느 누구도, '닭이 세번 울때'라는 명백히 긍정적인 신호도 믿지 못하며 어둠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내 주장은 이렇다.

믿어야 할 것을 믿는것.

믿어야 할것을 믿어야 어떤 공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더 이상 강남살인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을(특히 남성)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며 두려울 필요는 없다. 조현병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잠재적 위험에 대해 대비하는 것과 잠재적 위험의 것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끌어올려 두려움으로 사는것은 다르다. 두려움자체에 얽매여 있을 때는 오히려 '믿어야 할 것'을 가릴 수 있지 않게되며 더 상황은 험악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멜라니의 남친의 여동생처럼 믿어야 할 것은 믿어가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그 뒤에 어떤 공포스러운 일이 있다고 할 지라도, 무언가를 믿으며 특히 세상의 선의나 진리와 같은 잃지 않아야 할 가치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오예, 나도 이제 '강남', '여혐'의 공포에서 좀 적극적으로 빠져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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