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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Study/Films

never let me go

by S.jeanne 2015. 4. 12.

NEVER let me Go

감독 : 마크 로마넥 , 2010

음악 : 레이첼 포트만

원작 : 이시구로 가즈오 <나를 보내지 마>, 2005





미국이 가진 몇 안되는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의식이 반영되어있는 영화.

이에 대해서는 미국중심적 사고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경계심으로는 비판할 만 하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복제 기술인 '클론' 기술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어긋나있는지이다.

인간복제 기술에 대한 윤리논쟁은 미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이뤄지고있는 과학윤리부분의 문제이다.

미국인들이 가진 기독교적 정서에서 완전하게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클론'기술만을 집어내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세명의 주인공은 '헤일샴'이라고 불리는 클론들의 기숙학교에서 만난다.

이 '헤일샴'은 클론 윤리의 마지막 보루.

'헤일샴'의 관리자들은, 클론들에게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어린시절부터 그들의 그림과 음악적 재능을 모은다.

그렇지만 결국 '헤일샴'은 문을 닫고, 클론기술에 대한 윤리적 논증은 끝을 맺는다.


영화의 후반부 "더 이상 사람들은 그들의 암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거예요." 라는 대사는 그 윤리적 논증을 인간의 자기애가 이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간에 '루스(키이라 나이틀리)'가 자신의 원본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루스는 자신의 원본을 찾기를 기대하며, 자신과 닮은 사람이 근무한다던 은행에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원본을 만나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면서 소리치는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닌것이 틀림없어, 우리의 원본을 찾기 위해서라면 쓰레기통에서 찾는게 빠를꺼야!"라는 대사.


이 대사가 함축하는 바는 크다.


영화는 단순히 이 장면을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루스'의 혼란인 것처럼 보여준다. ( 이 부분이 미국영화의 한계라고 느낀다.)

그러나 과연 루스의 이야기처럼 창녀나 마약상 과 같은 사람이 루스의 원본일 수 있는걸까.

이 이야기는, 작품 안 세상의 또 다른 면에서 상상되어져야한다.


의미있는 영화이니만큼, 더 넓은 폭으로 이해되길 바란다.


영화를 이끄는 스토리도 탄탄하고, 감정선은 놀랍도록 예민하다.

함께 올린 스크린 샷의 장면은 토미와 캐시의 감정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담고있어 충격적이였다.

일본 소설이 원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니, 그제야 영화가 가진 일본풍의 분위기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쉽게 이해되기 어려울 만큼의 특별한 감정을 가진 복제 인간.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기 위해 만들어지고, 2번 혹은 3번, 4번, 몸이 버틸 때 까지 장기기증을 하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토미, 캐시, 그리고 루스의 이야기이다.


토미가 그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며,

'헤일샴'의 관리인들이 그림을 모은것이 영혼을 읽기 위해서 일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것.

그리고 그의 그림으로 표현된 그림들은 감독의 섬세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부분이다.


추천할 만 한 영화이다. 영화는 영상미와 음악도 뛰어나다.



지금 우리사회는 다행이도 '체세포 복제' 혹은 '줄기세포 복제' 와같은 복제논쟁은 일단락 되었고. 특히나 인간복제기술과 관련되기 쉬운 성체세포 복제부분은 금기율이 되어있다.


2005년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가 진율을 보였을때 즈음까지 활발했던 인간의 생존권과 배아의 생명권 논쟁은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더 이상 진전은 없다. 그리고 복제 연구는 암묵적 동의하에 막을 내린 것 같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연구에 대한 정보수집은 하지 않음.)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참상은 아마도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일까?

영화를 보며 들던 공포감을 '저건 가짜이다.'라며 떨쳐버려도 되는 걸까?


나는 이에 대해 그 어떤 확언도 할 수 없겠다.


영화가 보여주는 참상을 <클론>들의 괴로움, 슬픔 으로 소급해서 이해하지 않고

"윤리논쟁" 이 제거된 과학기술이 불러오는 참상으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의 선택으로, 어디에서 발전되고 연구되고있는가.

우리는 어떤 기술에 높은 가치를 둘 것인가.


놀라운 의학기술? 놀라운 컴퓨터의 정보처리기술?

컴퓨터의 정보처리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인간은 점점 더 살기 편해지고 있는가.


그것이 인류가 더 행복해짐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 대답은 사실, "아니다."이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일은 모쪼록 위험하다. 사회가 지니게 될 위험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제아무리 편리한기술이 나와도 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된다.

자신의 선택으로 원하는 기술을 연구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일부이다.

과학기술은 지금의 사회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위험에의 증가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크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 혹은 그를 송전하는 '송전탑' 건설로 인해 망가지고 있는 한국의 몇몇 마을들과 농민들의 이야기는 귀에 익숙한 문제이다.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사회불평등의 심화란 이런 것과도 비슷하다.


더 낯익은 '마르크스 주의'사회학의 관점에서는 과학기술이 인류의 노동력 상품가치를 하락시킨다는 것을 비판해 볼 수도 있다. 돈이 되는 노동력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전환할 기회가 고루 배분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 "더 나은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자"가 필연적으로 우월하다.



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윤리적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한다. 뛰어난 연구를 하며 뛰어난 업적을 이뤄내고있다. 그러나 그들과 "윤리"를 논하는 대중, 혹은 인문학자들과의 다리는 이어져있지 않다.

그들의 순수한 의도와는 다르게 연구의 내용이 사용될 가능성은 상당부분 열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사회는 더 열심히 "어떤"과학기술을 연구할 것인지,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논쟁해야한다.

그리고 영화 <Never let me go>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상상도 지속, 확장하며 공유해야한다.


비단 '클론'기술만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것이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모든 환상적인 진보에는 딸려오는 문제들이있다. 우리는 얼만큼의 문제를 수용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사회학 , #사회학, #영화, #문화연구,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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