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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Study/Books

이승우 사랑의 생애

by Sociology/ FPE S.jeanne 2017. 11. 8.



이승우, 『사랑의 생애』, 2017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p10)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사랑 앞에서 자기 몸을 한껏 낮추면서 동시에 사랑을 한낱 자격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더 위악적으로 해석하자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격을 얻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그러지 않는 다는 태도를 견지함을써 그 자격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높이는 방법. (p15)


그날, 사랑할 자격 운운하면서, 그가 겸손을 앞세워 오만을 부렸다는 말은 이미 했다. 그리고 그녀에 의해 그 오만이 폭로되는 순간 그가 움찔했다는 것도. 그러나 그는 곧 그 순간의 순간적인 당황을 이겨냈고,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을 자기에 대한 경멸로 규정함으로써, 경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술을 동원할 수 있었고, 겸손을 앞세운 오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짐작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 그가 왜 새삼스럽게 삼 년 전 그녀의 표정에서 연민을 찾아낸 것일까. 무슨 필요가 그런 현상을 만들어낸 것일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사랑을 자격의 문제로 둠으로써 오만을 유지하는 것이 왜 이제 불가능해졌을까. 자기가 얼마나 경멸받을 만한 사람인지 이해하는 대신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 이 전환은 왜 필요했고, 어떻게 가능했을까.(pp19-20)


둘만 있을 떄는 그녀를 향해 특별한 감정이 생기는걸 부정하기 힘들었다. 단둘이 한방에 있는 상상을 가끔 했었다.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랬는데 그녀가 그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해왔을 때는 이상하게 가슴이 움츠러들고 근육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그녀를 향한 자기의 감정이 단순한 호감일 뿐이어서라고 단정한 그는 그녀의 고백을 못들은 척 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튕겨져 나가듯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사랑에 잡히지 않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p65)


그에 의하면 카프카는 결혼 제도의 불순함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결혼은 필요하지만 사랑 때문에, 혹은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필요하지만 결혼 때문에, 혹은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p80)


형배는 그 상처와 절망을 대면하고 살았다. 사랑을 위한 행동(예컨대 아버지의)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의식했을 때 사랑은 끔찍한 것이 되었다. 그 기억들은 파편적인 여러 이미지로 형배의 내면에 자리했다. 사랑을 위한 아버지의 도피가 그 아들로 하여금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도록 조종했다고 말해야 할까.(p87)


그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p92)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떠오르지 않아서 보고싶다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p207)

그녀는 영석의 말에서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이 사랑 표현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길들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말속에 표출된,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포장된 의심과 불안을 간과했다. (p209)


"할 수 없는 인간이야, 당신. 나도 사람이야. 더는 참을 수가 없어." (p251)


그에게 사랑은 상승하는 것이었다. 밝고 강하고 충만한 것이었다. 빛을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오르고 지향하고 누리는 것이었다. 어둠과 결핍과 하락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사랑이었고, 삶이었다. 아프고 모자라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런 사랑을 생각하지 않았다. 행여 그런 사랑을 하게 될까봐, 말하자면 젊은 날의 그의 어머니처럼, 그래서 아플까 봐, 그래서 약해지고 비참해지고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해 울고 낙오할까 봐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는 혼란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주 잘못 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참 후에 그는 겨우 신음처럼 물었다. 사랑이, 대체 뭐예요? (pp281-282)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형배는 자기가 물 속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물 밖에서의 물의 성분과 성질을 따지는 연구자와 진배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희와 영석은 물 안에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사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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