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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ology/Song Sangyoung

<나의 미국 유학시절>, 송상용, 1972

by Sociology/ FPE S.jeanne 2016. 1. 18.

 

나의 미국유학시절-

 

食道樂 U.S.A.

송상용 (서울대 문리대 강사)

 

“Chameleons feed on light and air: Poet's food is love and fame.” Shelley는 이렇게 읊었다지만 나 같은 범인에게는 Bible의 다음 구절이 더 appeal한다. “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shall die.” Isaiah xxii.13. 그러니 먹는 얘기부터 해보자. 공부도 배가 찬 다음의 일.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좋아하는 양식을 먹게 돼서 잘됐다 했고 나도 음식은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하나 그게 아니었다. baggage가 바뀌어 Anchorage에 하루 묵으면서 맛본 天下珍味 Alaska king crab은 별로 좋은 줄 몰랐다. 극도로 지친 탓이었겠지. 본토에 들어가서는 이미 자리 잡은 친구들을 찾아 미국을 일주하다시피 했다. 집에서 부인들이 정성껏 만들어주는 한식은 참 신기했다. San Francisco, Los Angeles의 고려정, New York의 삼복정 등 한국 식당에서 Americanized Korean food를 즐기기도 했다.

orientation을 받으러 Michigan State Universityundergraduate dorm에 들어가자 비로소 여기가 미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별수없이 세끼 양식을 먹게 됐구나.MSUdorm food는 꽤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juiceice cream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고마웠다. 외식은 중국집에서 한번, 한국 의사 댁에 초대받아 한번 했을 뿐이다. 어쩌다 얼큰한 생선찌게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서 온 room mate는 음식이 맞지 않아 우유와 과일만 조금 들 뿐 거의 절식상태였다. 축 늘어져 있다가 town에 사는 친구가 불러 가면 spicyIndian food를 먹고 생기가 나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에게 쇠고기 먹는 법을 배우라고 약을 올려주었다.

Bloomington에 가서도 dormitory에 들어갔다. 시간을 아끼고 미국생활을 빨리 익히는 지름길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single room 양쪽에는 전 대통령 Harry Kasdorf (독일계)Dwight Castro (Spain). 편집자 주: TrumanEisenhower 대통령의 first name은 각각 Harry, Dwight가 살았다.

IndianaGRC(Graduate Residence Center)13 units로 되어 있고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dining hall은 하나뿐이어서 몹시 붐볐다. 물론 cafeteria. 줄 서서 meal ticket을 보인 다음, tray를 들고 counter를 지나며 혹은 집고 혹은 받아서 table로 간다. 두리번거려 아는 사람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아무데나 앉아서 통성명하고 함께 먹으면 친구가 된다. , soup, 우유 등은 얼마든지 갖다 먹을 수 있으나 고기는 second serving이 안 된다. juice도 작은 cup에 담아놓은 것 하나로 끝난다. MSU보다 짜다.

아침에는 815분까지 식당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넘으면 late breakfast를 하도록 허가를 받지 않는 한 못 들어간다. 늘 새벽녘까지 책을 읽어야 하니까 늦잠자다 아침을 놓치는 수가 많다. 미국 학생들도 11시쯤 아침 겸 점심으로 brunch를 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개척시대 미국인들은 동트기 전 들에 나가 일하고 돌아와서 먹었기 때문에 heavy breakfast였다는데 이제 바쁜 도시인들은 coffee 한잔으로 때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도 dorm에서는 구색을 맞춘다. juice; toast, pancake or rolls; eggs; sausage, bacon or ham; cereals or oat meal; coffee or tea판에 박은 듯한 menu. 잠이 부족하고 담배를 많이 피워대니 입맛이 날 리 없다. 그래도 먹어야지. 정말 살기 위해 먹는 것이다.

점심에는 간단한 hamburger, ham같은 것이 나오고, 저녁에는 steakroast beef, 11chicken을 먹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맛이 없다. 값싼 고기를 쓰는 까닭이다. 명절 때의 special dinner에는 좋은 고기를 쓴다. 언젠가 먹어본 fillet mignon은 입에 들어가자 슬슬 녹았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외국 학생이 많아 그런지 rice는 언제나 있는데 butter를 넣고 찐 것이어서 빵보다도 못하다. 어느 독일 친구가 감자 대신 밥을 집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더니 미국 사람들은 감자요리를 할 줄 몰라서 밥이 오히려 낫다는 대답이다. 영국 친구 하나는 도대체 미국에서는 decent food를 먹어볼 수 없다고 내뱉듯 말했다. hamburgerhot dog을 빈정댄 말이다. 그러나 이 둘이 미국의 representative food임을 어쩌랴. 어쨌든 미국 학생들의 불평도 대단했다. “This is not an American food. This is GRC food.”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최고란다. “Russian dorm food was worse than this though.” 이것은 Moscow에 유학했던 Russian major의 비교.

날이 갈수록 식당에 들어가는 것이 지겨워졌다. 기름진 것만 취하니까 무엇보다 매운 것 생각이 간절하다. 야채에 dressing 대신 지독히 매운 tabasco sauce를 쳐보았더니 정신이 번쩍 났다. 제일 열심히 먹은 것은 역시 milk였다. 몸 생각해서 하루 석 잔 이상 꼭 마셨으니까. 처음 온 동양 학생들은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해 고생한다. 설사하면서도 참고 마셨더니 나중에는 참 맛을 알게 되었다. 더러 차를 가진 미국 친구를 따라 town의 소문난 집에 가서 아침을 먹어보았다. doughnut, French toast, pan cake, waffle, BLT(toast 사이에 bacon, lettuce, tomato를 낀 것), etc. 역시 좋았다. 밑천 생각나 자주 못나가는 게 유감.

일요일엔 1시쯤 dinner가 나오고 저녁은 주지 않는다. 미국 애들이야 집에 가거나 restaurant에서 date를 하지만 외국 학생들은 정말 따분하다. 다행히 나는 off campus에 사는 친한 한국 친구가 데려다가 밥을 지어주어 사먹은 일이 거의 없다. 결혼해서 나가 사는 다른 한국인들도 가끔 초대해준다. reciprocation을 할 수 없으니까 간단한 물건을 사들고 가고 다 먹은 뒤 설거지해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모두 바쁜 처지에 친구 신세만 질 수도 없기에 hot plate, pan, cup 등 몇가지 살림도구를 장만했다. 나 있던 hall에는 cooking facilities가 없어 불편했다. 할 수 없이 방안에서 몰래 해먹자니 냄새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menu는 기껏해야 밥과 sausage, canned fish, 그리고 spaghetti와 간장, 김으로 만든 우동 정도였다. 몇 차례 같은 hall의 인도, 일본 학생들과 lounge에서 한 가지씩 요리를 만들어 international dinner를 한 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68년 여름 두 학기 GRC 생활을 청산하고 대학 앞에 방을 얻고 자취를 시작했다. 도착 이래 어머니처럼 나를 돌봐주어 온 친구 C, 그리고 미국 학생 둘과 함께 살았다. kitchen을 같이 쓰는데 미국 친구들은 instant foodfrozen dinner를 주로 애용하고 가끔 고기를 구워먹는 정도니까 우리 것이나 다름없었다.

C는 보기 드문 미식가인데다가 뛰어난 요리 솜씨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음식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 나하고 만났으니 식도락에 열을 올릴 수밖에. 나는 그에게서 많은 요리법을 배웠고 내가 아는 recipe를 실습할 수 있었다. 바쁘니까 두 끼는 적당히 넘기고 저녁에는 다채로운 한정식을 해먹었다. 한주일에 한두 번 큰 장을 보고도 틈틈이 grocery에 들려 새로 나온 것, sale하는 것을 사온다. 어느 틈에 shopping하는 요령이 붙어 item에 따라 싸고 좋은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미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고 소비량도 큰 것은 뜻밖이었다. 미국인들은 floppy long grain을 좋아하므로 한국 쌀 비슷한 short grain은 오히려 값이 싸다. 한국 쌀보다 나은 것도 있었지만, 우리는 100lb packed rice를 사놓고 먹었는데 값은 한국보다 싸고 맛도 손색없었다. 간장은 日製 Kikoman이 있으나 미제 La Choy도 훌륭했다. 된장은 miso(왜된장)보다 많은 종류의 중국 된장 가운데 한국 것과 비슷한 것을 골라 썼다. 고추장은 역시 질 좋은 것이 없어 집에서 부쳐올 도리밖에 없었다.

미국에도 한국의 주요 채소는 거의 다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spinach, eggplant, cucumber, zucchini(호박), leaf lettuce(상치), etc. etc. 무는 비슷한 것으로 turnipradish가 있으나 여기 것과는 다르다. 고추도 다른데 어쩌다 나오는 Hungarian pepper는 한국 고추와 똑같아서 내가 가장 즐겼던 것이다. 한국에 없는 채소로는 같은 종류에 속하는 broccolicauliflower가 있다. 양념도 파(green onion 또는 scallion), garlic, ginger 등 다 있으나 고춧가루는 제 맛이 안나 집에서 갖다 먹었다. 이러니 외 생채, 가지나물, 호박전, 상치 쌈 등 웬만한 반찬은 다 만들 수 있다.

너무나 유명한 김치. Korean food하면 대뜸 kimchi 하는 외국인이 많다. 그런데 나는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에게 김치가 한국에서는 indispensable food임을 강조하면서 나는 exceptional Korean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dorm에서 양식만 먹으니까 가끔 김치 생각이 났다. 나도 별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동포의 집에 가서 김치를 보면 반가워하게 되었고 아가씨표 통조림 김치도 몇 번 사다 먹었다. 일단 밖에 나와 매일 한식을 먹게 되자 김치 생각이 다시 없어져버렸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래도 김치는 늘 담가놓고 조금씩 먹었다.

같은 홀아비 L대위에게 전화로 recipe를 물어 cabbage로 담근 첫 작품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으나 나로서는 대견하기만 했다. 얼마 안가 한국 배추와 꽤 비슷한 Chinese cabbage가 있음을 알고 그 다음부터는 이것을 구해 썼다. 간단했다. 배추를 썰어서 절인 다음 물로 씻고 일제 shrimp sauce(새우젓), 중국 shrimp paste 또는 Philippinesanchovy(멸치젓)와 양념을 넣고 버무려 간을 맞추고 큰 병에 담아 하루 이틀 두어 적당히 익었을 때 냉장고에 넣으면 된다. 같이 사는 미국학생 중 IrishValspice라면 질색이었으나 Bob은 여간 한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친구는 Czech-Hungarian으로서 그 쪽 사람들은 꽤 spicy한 음식을 먹는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와 저녁을 만들어주었을 때 garlic powder를 넣은 보리밥과 순대 비슷한 Czech sausage를 얻어먹은 일이 있다. 불고기와 김치를 준비해서 같이 먹자고 하면 Bob은 입이 딱 벌어지곤 했다. 이사 간 다음에도 나는 몇 번이나 김치를 담가다주어 그를 기쁘게 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처음엔 김치를 맛보고 상을 찌푸리지만 몇 번 먹고 나면 광적으로 좋아하게 된다. 참 묘한 음식이다.

미국은 한국과는 반대로 고기가 싸고 채소가 비싸다. 채소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리라. 미국인은 meat-eaters라 그런지 고기의 부분 이름이 놀랄 만큼 세분되어 있다. 쇠고기의 경우 몇 가지만 들어보아도 flank, chuck, sirloin, round, T-bone 등등 다양하다. 양질일수록 연하고 맛있는데 물론 값도 질에 따라 차가 크다. 주머니가 가벼운 외국 학생으로서 비싼 고기를 사 먹기는 어렵다. 내가 애용한 것은 butcher's에서 자르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아놓은 stew beef 였다. 저들과 달라 우리는 고기를 작게 썰어서 요리하니까 안성마춤일 뿐 아니라 값도 아주 쌌다. 큰 덩어리 고기도 스키야키용으로 해 달라 하면 slice해주어 불고기 만들기에 좋다. hamburgerground beef 라고도 하며 대체로 좋지 않은 고기를 갈아 만든 것이어서 값이 싼 편이다. rib은 기름이 많아 재미없고 sparerib에 양념고추장을 발라 군 것은 일미였다. chicken은 통째로 얼린 것도 있고 다리, 날개, 몸으로 나누어 팔기도 한다. 다리만 사다가 양념간장을 무쳐 oven에 넣어 구워도 좋고 제일 싼 날개를 푹 삶은 다음 고기를 뜯어 양념해서 다시 끓이면 닭곰탕이 된다. 평안도식이라던가?

유학생들이 많이 했다고 들어왔지만 나도 종종 butcher's에서 cow bones를 거저 얻어다 여러 시간 고아서 두고두고 먹었다. 뼈를 찾는 친구들이 많아지자 어떤 grocery에서는 약삭빠르게 soup meat라는 label을 붙여 파는 곳도 생겼다. 값은 dime정도로 거의 거저다. Bob에 따르면 미국서도 Depression 때 먹을 것이 없어 개 준다고 뼈를 얻어다 실제로는 사람이 끓여먹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liver 정도를 빼 놓고는 거의 내장을 안 먹는데 곱창을 얻어먹은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루는 Cstockyard에 가서 곱창 한 bucket을 얻어왔다. 똥을 발라내는 데 한 시간 걸렸다고 비위가 약한 그는 결국 먹지도 못했다. 친구들을 불러 교외의 park로 가지고 가서 서울식 부산식으로 실컷 구워먹고 며칠 두고 전골을 해먹었다.

布魯明頓(Bloomington)에도 Chinese Restaurant이 하나 있다. 미국의 웬만한 도시에는 으레 하나씩 볼 수 있지만. 중국요리의 보편성은 감탄할 만하다. 그것은 어디 가나 그 곳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변형된다. 미국의 중국 요리는 물론 Americanize되어 있고 미국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한국 사람에게는 안 맞을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미국의 중국 요리는 거의 다 Cantonese. 한국의 그것이 山東式이듯이. 따라서 우리에게는 낯선 요리가 대부분이고 우리가 찾는 음식은 없는 것이 많다. 예컨대 炸醬麵은 찾아볼 수 없고 만두도 드물다. 그 대신 가장 대중적인 dish로서 Chop SueyChow Mein이 유명하다. 전자는 잡채 비슷한데 밥과 같이 나오고 후자는 여기에 튀긴 국수가 들어 있다. 고기와 채소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여러 종류가 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집에 들어가면 습관적으로 짜장면을 찾는데 그것이 없는 것을 알면 몹시들 섭섭해 한다. 우연히 북부 IndianaMidwest 유일의 Peking Restaurant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Bloomington에서 Chicago까지의 꼭 중간에 위치하며 IUrival인 과학의 명문 Purdue가 있는 곳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P형 내외, C,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은 차를 몰고 West Lafayette에 들어갔다. 漢都酒家는 굉장히 큰 고급식당이었다. Purdue 물리학과 출신 중국인이 경영한다고 한다. menu를 보니 과연 있었다. Peking Special Noodles(炸醬麵); $2.00 Boiled Ravioli(水餃); $1.20. 얼마나 반가웠는지! 시켜서 먹어보니 똑같았다. 다만 국수가 手打가 아니라 spaghetti라는 것을 듣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왕복 250 mile. 짜장면 한 그릇 먹으러 천리를 달려간 것이다. 어이없는 일일까? 천만에!

 

 

 

 

 

 

 

 

 

 

 

 

 

 

 

 

 

 

 

 

 

 

 

 

 

나의 미국유학시절----

 

식도락 U.S.A.

 

 

68년 가을에 아내가 들어왔다. Main Library에서 2 blocks 떨어진 낡은 office building3층을 빌려 살림을 차렸다. 1주에 한 번 garbage를 갖다버리고 겨울에 집 주위의 눈을 친다는 조건으로, 시가의 반도 안되는 월 45달러의 rent를 내게 되었다. 말하자면 행랑아범이었다. 명색이 furnished apartment였고 취사도구, 식기도 떠나는 친구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있어 별로 더 사지 않고도 신접살림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 달에 150달러 가지고 사는 budget living이었지만 생후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미국 생활로서는 바닥이지만 말이다.

아내는 곧 대학 안의 Educational Placement Bureau에 취직해서 안팎이 바쁘게 되었다. 우리의 일과는 눈 뜨자 마자 juice glass 마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원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toast, milk, cereal, coffee 정도로 간단한 조반. 그리고 직장으로 학교로 간다. class가 없는 날에는 늦게 일어나 혼자 아침을 먹기도 한다. 아내는 sandwich를 만들어갔는데 재료로는 ham, luncheon meat, tuna, cheese 등을 썼고 lettuce, carrot, celery를 곁들였다. 빵을 싫어하는 나는 집에 들어와 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때가 많았다. 나는 원래 밥보다 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spaghetti는 한국의 기계국수보다 훨씬 질이 나아 애용했다. 한쪽에서 물을 끓여 spaghetti를 삶으면서 onion, hamburger에 중국 된장을 넣어 볶아가지고 얹으면 10분 안에 훌륭한 肉磨乾炸醬麵이 된다. can에 들은 sauce를 데워서 spaghetti를 만들면 시간은 더 절약된다. 후딱 먹고 번개같이 그릇까지 씻어놓고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고달픈 생활의 반복이었다.

저녁에는 흔히 내가 밥을 지어놓고 퇴근하는 아내를 맞았다. 우습게 들릴는지 모르나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회다. 물론 미국서도 부엌일은 여자 소관이지만 필요시에는 이 분업체계가 깨질 수 있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라 저녁도 big meal이 되기는 어려웠다. 대개 반찬 두어 가지를 만들되 menu는 매일 바꿨다. 자주 먹은 것으로는 앞에 말한 bone soup말고도 ox tail soup(꼬리곰탕), turnip leaves soup(시레기국), 불고기, 닭구이 등이 있다. 한국 양념에 싫증이 날 때는 서투른 솜씨로 steak, hamburger를 만들어 먹었다. 헤아릴 수 없이 종류가 많은 sausageham도 맛들이면 즐길 만하다.

제일 아쉬운 것은 생선이었다. 내륙 지방이라 주로 frozen fish인데 이건 제 맛이 안 난다. 그래도 더러 white fish, ocean perch 같은 것이 들어와 허기를 면했고 Indiana 특산인 메기(catfish)로 매운탕을 해먹었다.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fish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요리도 할 줄 모른다. soup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굽는 냄새는 질색이다. 뭐든지 fry하는 것이 고작이다. 더구나 날로 먹는다면 질겁을 한다. 그런데 나는 그 회를 못 먹어 미칠 지경이었다. 해안지방이라면 문제가 없다. New York 갔을 때 누이가 해준 salmon회는 얼마나 좋았던지! 일본 식품점에는 tuna(마구로/다랑어)로 스시도 만들어놓고 판다. Bloomington에서는 어찌나 주렸던지 언젠가 codfish(대구) 2 lbs.를 앉은 자리에서 날로 다 먹은 일도 있다. 얼린 것으로는 간혹 동태(pollack), 오징어(squid)를 구할 수 있다. frozen shrimpfresh oyster는 비싸서 침만 삼키고 더 비싼 lobster는 큰 맘 먹어야 사게 된다.

Bloomington에는 한중일 학생이 300명을 넘기 때문에 Hatch's IGA라는 groceryOriental food section이 있다. 여기에는 김, 멸치, 버섯, 고춧가루, 참기름 등등 없는 것이 없는데 값이 비싸고 대부분 일제라 기분 나빠서 잘 사지는 않았다. 해산물, , 말린 나물은 집에서 보내오고 또 New YorkChina town에서 싸게 장보아온 것이 있어 오히려 처치 곤란이었던 것이다. 두부는 일제 canned tofu가 있으나 1달러 가까이 하고, Chicago에서 paper box에 담아 차편으로 가져오는 것이 싸서 쉬지 않았으면 사다 먹었다. 만두껍질 밀어놓은 것도 파는데, 이것은 중국요리용이지만 우리는 두부, 숙주나물과 함께 갖다가 만두를 빚었다. 참 편리하게 되어 있다.

살림이라고 시작하니 혼자 있을 때와는 달라서 가끔 social gathering이 불가피했다. 심심치 않게 초대를 받고 또 답례로 초대를 하게 된다. 1차로 GRC 총각, 처녀들을 불러 완전무결한 한식으로 대접했다. 미국서 한국인들이 회식할 때는 buffet style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큰 접시에 음식을 담아놓으면 각 자 접시를 들고 가 적당한 양을 덜어서 제자리에 가서 먹는 것이다. 먹던 것 남을 염려가 없고 큰 table이 없어도 되니까 좋다.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가까운 한국 가족, 신세진 미국인, 3국 학생들을 초대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 먹는 대로 손님을 대접하니까 크게 부담될 것이 없다. 여느 집에 가면 푸짐하게 차리는 곳도 없지 않으나 학생들 집에서는 너무하다고 섭섭할 정도로 간단한 음식을 내놓는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보통 때보다 몇 곱절 잘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동양 학생들은 다 그랬다. 우리는 variety 있고 typicalgenuine Korean cuisine을 맛보이고 싶었다. 머리를 써서 menu를 짜고 장을 보아 온다. 한식은 잔손이 많이 가서 둘이 꼬박 몇 시간 준비해야 한다. spice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두어 가지 양식을 준비하고 두 번째 초대라면 중국, 일본 요리를 곁들이기도 한다.

역시 불고기가 인기여서 이것은 거의 빼놓지 않았다. 육회를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중심은 채소. 고추, 호박, , 가지, 시금치 등을 활용하고 집에서 온 고사리, 도라지 나물도 등장한다. 영어에는 나물이란 단어가 없다. 그러나 기후가 비슷한 미국에 나물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먹을 줄 모르고 따라서 이름도 모른다. 내가 먹어본 것은 씀바귀, 명아주, 미나리(야생) 정도지만 고사리가 난다는 얘기를 들었고 인삼이 있으니까 도라지도 있을 법하다. 북어무침, 김구이, 투각, 멸치조림 등 sea food는 특히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약식 신선로, 칼국수, 만두국도 만들었지만 우리의 큰 자랑은 식혜였다. 집에서 부친 엿기름으로 만드는데 온돌이 아니라 삭히는 것이 문제다. 할 수 없이 radiator 위에 올려놓으니 더딜 수밖에. 밥알 뜨는 것을 지켜보느라고 밤을 꼬박 새운 일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쌀로 만든 식혜의 밥알 모양이다. 끝이 쪽쪽 갈라지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식혜를 얻어먹고 극성이라고 감탄했다. 하나 나는 두부와 엿을 만들어 보지 못한 게 유감이다. 술을 못 담가 먹은 것은 千秋이고.

IU campus에 은행나무가 있음을 안 것은 간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늦가을 어느날 도서실 옆을 지나다가 코에 익은 악취에 발을 멈추었다. 은행 열매가 뒹굴고 있었다. 100년 가까이 되는 큰 나무였다. 일본인이 갖다 심은 것이라 한다. 은행은 영어로 kinko nut이다. 일본말에서 딴 듯하다. 한국인이 먼저 소개했다면 unhaeng nut이 되었을 것을. TaekwondoKorean Karate로 통하는 현실을 다시 생각게 한다. 은행이 먹을 수 있고 더구나 귀한 실과라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행인이 뜸해지는 해질녘에 다시 찾아가서 열심히 자루에 주워 담았다. 미국인들은 무엇에 쓸 거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마침 중국인 교수 Dr. Teng이 지나가다 보고 어디 가면 내다버린 은행이 많다고 친절히 일러준다. No wonder. It's the king of nuts in China. 집에 가서 씻어 말렸더니 두어 말이 실히 되었다. 이것을 친구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손님 올 때마다 꼬챙이에 끼여 굽거나 달걀찜, 신선로에 넣어 대접해서 유명해졌다. 미국에는 chestnut도 있으나 잘 먹지 않는다. 한번은 departmental picnic에 밤을 가져가서 군밤을 만들어 나눠주고 너희들은 이 좋은 것을 먹을 줄 모르느냐고 흉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은행도, 밤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식성이 다른 모양이다.

Indiana의 명물에 persimmon pudding이 낀다지만 감을 과일로 먹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곤란하다. Paul이란 친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감 비슷한 열매가 열린다는 얘기를 했다. 듣고 보니 아무래도 고염 같아서 좇아가보았다. 틀림없었다. 반가워서 막 주워 먹는데 이 친구는 맛을 보래도 선뜻 응하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물건은 다 먹는 것도 우리가 가난한 탓일까?

과일은 대체로 한국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pear는 우리가 아는 배가 아니다. 모양이 길쭉하고 물렁물렁하다. 시원한 맛이 전혀 없다. 사과는 기대한 것보다 나았다. “delicious”라는 작은 것을 치는데 역시 달기만 할 뿐 대구 사과 같은 시고 새뜻한 맛은 찾아 볼 수 없다. melon은 노랑참외와는 다르고 청참외 비슷한 cantaloupe이 있다. water-melon은 바로 무등산 수박. 어마어마하게 크다. “Why is everything so big here?” 이것은 몸이 작은 어느 French coedcynical한 미국 인상이다. 그렇다. 가지, 수박, 사람, 대학모든 것이 대형이다. orangeFlorida, California에서 쏟아져 들어오는데 수많은 종류 중에는 기막히게 맛있는 것이 있다. 값은 한국의 1/10도 안 되는 것 같다. 제주도 귤은 tangerine이라 하고 흔하지 않다. MoroccoTangier가 원산지인 모양. Hawaii에서 pineapple이 들어오고 중남미에서 coconut, mango 등 열대 과일이 수입되어 뭐든지 구할 수 있다. 포도로 착각하기 쉬운 grapefruit도 우리에게는 낯선 과일이다.

미국 가서 한국 음식만 먹었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다. American food를 발굴하고 즐겼어야 진짜 gourmet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식도락에는 돈이 필요하다. scholarship을 받았지만 남는 돈이 있으면 책을 사야지 먹어버릴 수는 없다. 고급 restaurant에서 full course dinner를 즐겨보지 못한 것은 학생 신분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tate capitalIndianapolis에 갔을 때 무심코 Steak House에 들어가 menu를 청했다. 들여다보니 10달러 가까이 되지 않는가. bar를 겸한 호화 식당이었다. 그냥 나오기도 체면문제였다. 1달러짜리 Martini를 시켜 마시고 대낮에 얼굴이 벌개져 나오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근처 cafeteria에 가서 셋이 배불리 먹었는데 계산은 4달러가 채 안됐다.

싸구려 음식 얘기나 좀 해야겠다. 하기야 싸고도 맛있는 음식을 찾아먹는 사람이 진짜 미식가일지도 모른다. eat out한다는 것은 어디서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외식을 하게 되면 반드시 소문난 집을 찾아가는데 특히 statewide or nationwide chain을 갖고 있는 restaurant이면 절대로 믿을 수 있다. steakBonanza Sirloin Pit이 유명하다. Texas style에다 charcoal broiled로서 맛이 희한하다. baked potatosalad까지 포함해서 2달러 남짓하니 싸다. Arby's Roast Beef Sandwich는 깨를 묻힌 빵이 특이하고 Jamocha shake(일종의 milk shake)와 함께 먹는다. hamburgerBurger Kingwhopper가 일미였다. 여기에는 tomato, lettuce 말고도 pickle, onion, catsup, mayonnaise를 섞게 되어 있는데 seasoning에서 독특한 맛이 나는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Buffalo에 갔다. K선배의 집을 못 찾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날 American LegionAnnual Meeting이 열렸기 때문에 시내의 hotel, motel이 초만원이었다. 철야식당에 앉아 밤을 새게 되었는데 밤참으로 먹은 chicken이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Niagara Falls로 안내하는 선배에게 미국 닭은 왜 그렇게 맛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한참 가다가 차를 세우고 예쁘장하게 단장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수염 기른 할아버지를 그린 box를 사들고 나왔다. 그것이 바로 Colonel Sanders25년 걸려 만들었다는 Kentucky Fried Chicken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닭고기는 처음 먹어 보았다. flour-dusted chicken으로서 11가지 exotic spices and herbs를 섞는 secret recipe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열둘도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상까지 탔다는 이 chicken은 미국 어디 가든지 볼 수 있고 멀리 Europe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미국인들도 monotonousindigenous food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색적인 외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 Cook Book을 사다 놓고 별식을 만들고 restaurant을 찾기도 한다. New York 같은 대도시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음식도 맛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은 Chinese, Mexican, Italian restaurants이다. Mexican foodspicy한 것이 특징인데 tacos, tamales, enchiladassnack으로 인기가 높다. 내가 Mexican hot sauce를 빨갛게 발라먹는 것을 본 미국 친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게 사람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은 Italian food이다. 그 가운데서도 pizza는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대중음식이다. 만들어 본 일은 없어 잘 모르지만 cheese를 섞은 밀가루반죽을 빈대떡처럼 해서(나는 pizza이태리 빈대떡이라 부른다) 그 위에 sausage, mushroom, salami, anchovies, pepperonicolorful하게 놓고 구운 것이다. supreme large를 한개 놓고 여럿이 두어 조각씩 떼어 먹으면 좋다. 씨 섞인 고추가루를 쳐서 손으로 들고 먹는데 뜨겁고 짜고 매우니까 coke와 함께 먹는 것이 보통이다. 공부하다가 자정 가까이 되어 출출할 때 먹으면 최고다. 서울서 엉터리 pizza를 먹는 때마다 Bloomington의 바로 집 앞에 있던 pizzeria 생각을 하게 된다.

먹는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31가지나 되는 ice cream의 다양한 flavor도 잊혀지지 않는다. 중요한 술 얘기도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다시 간다면, 그리고 돈과 시간이 넉넉하다면, 정말 멋진 epicure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끝으로 유학생들에게 부탁 한가지. 미국 가면 될 수 있는 대로 한식보다 local food를 먹으라는 것이다. 그 나라를 더 잘 이해하고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

 

 

 

 

 

 

 

 

 

 

 

 

 

 

 

 

 

 

 

 

 

 

 

 

 

 

 

 

 

 

해외에서 보고들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의 미국유학시절----

 

HOME STAY 東西南北

 

 

7년 전 내가 며칠 인도에 다녀왔을 때, 가정에 가보지 않았다면 헛봤다고 단언하던 친구 생각이 난다. 옳은 말이었다. 한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안 보고 그 나라를 알았다고 한다면 큰 착오일 것이다. 체미 2년 동안 나는 기회 있는 대로 미국가정을 찾았고, 그 경험은 미국을 이해하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은 melting pot이라고 한다. 어디 가나 비슷하고 모든 것이 획일적, 평균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미국 사회에서 공통인자를 빼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미국이다. 미국인은 아직 완전히 섞이지 않았고 지역적인 특수성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나는 비교적 여러 곳에서 여러 계층의 다른 ethnic background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지내보았다. 일부를 보고 generalize할 생각은 없고 다만 단편적인 인상을 sketch 해 본다.

San Francisco에 내리자마자 찾아간 곳은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의 회장 Mr. Morain . 전 세계에서 모은 골동품이 방마다 가득 찬 고급 apartment였다. 화제는 humanism, 유교철학, 두 나라의 정치 등 highbrow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1급 지성인 부부. 안팎이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한가한 날이 없고 잠깐 보기에도 각별히 금슬 좋은 한 쌍이었으나 자식 없이 사는 것이 갓 도착한 동양인에게는 쓸쓸하게 보였다.

외로운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Santa Cruz, Calif.widow Mrs. Olson, 독신으로 이제는 늙고 병든 Indianapolis의 한국인 2세 이마태 씨, 성이 모두 다른 세 아이를 기르는 Flint, Mich.divorcee Mrs. Norton 등등. Mrs. Norton은 작은 시골 교회에서 만났다. 그녀는 전쟁고아 출신 C형과 나를 Smorgasbord(일정액을 내고 얼마든지 갖다 먹을 수 있는 Scandinavia식 식당)로 데려가 점심을 사주었는데 합석한 목사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의논하는 것이었다. 집에 가보니 애들이 아버지 정에 주려서 그런지 몹시 따라서 수 없이 뽀뽀를 해주었다. 이혼을 다반사로 아는 미국 사회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박행의 여인은 방이 11개 있는 mansion에 살고 있었다. 직업은 waitress.

IndianapolisCamille도 역시 waitress인데 교외의 우아한 저택에서 5000달러짜리 최신형 차로 출근하고 있었다. 미국의 엄청난 부에는 그저 입이 벌어질 뿐. Westport, Ind.의 평범한 농부 Max183 acre의 땅을 혼자 갈고 Fairgrove, Mich.Carl40도 안됐는데 2000 acre의 농장을 경영한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한 끼에 10센트밖에 못 먹어 누렇게 뜬 Kentuckyhillbilly, 하수도도 없고 쥐가 우글거리는 대도시의 slum이 엄존하는 곳이 미국이다.

본격적인 home stayMSU에서의 orientation 도중에 있었다. Christian Rural Hospitality Council의 주선으로 70명의 외국 학생들이 Michigan 북부의 신도들 집에 할당되어 34일 가정생활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C형과 내가 간 곳은 인구 2500Cass City. host family Tuckey 부처는 이곳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40여년을 살아온 토백이. Mr. TuckeyScotch, English를 부모로 중학 1(7th grade)까지 다녔고, 부인은 German, Scotch의 딸로 고졸의 교양 있는 할머니였다. 초년에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20여년 concrete block 공장을 운영하고 각종 건설공사 청부를 맡아 상당한 재산을 모았는데 연전 심장병에 걸린 뒤 사실상 은퇴하고 사업은 아들들이 맡아하고 있었다. 62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이 가업인 concrete 일을 하고 둘째는 mechanical engineer, 셋째는 의사, 큰 딸은 간호원, 작은 딸은 국민학교 교사였다. 아들딸들이 모두 시내 또는 인근 도시에 살고 있어 이들을 돌아보는 것이 큰 낙인 듯했다.

집안에서의 대화는 주로 Mrs. Tuckey 와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퍽 인자한 분이었다. 미국 가정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음식도 반드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서 해주었다. 영감님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으나 자기 사업에 대한 긍지는 대단했다. 우리를 여기저기 공장으로 끌고 다니며 세세한 공정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감탄사를 발하면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사흘 내내 아들딸 집을 순방하는 데 거의 시간을 다 써 버렸다. 맏아들은 안녕하십니까하고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것이다. 내성적인 둘째 Charlie는 발명특허를 낸 것이 인연이 되어 서독 회사로부터 좋은 offer를 받고 있지만 아들이 멀리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서 이런 효자를 만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두 분이 겨울에 Florida로 피한 가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들들에게 땅을 떼어 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아들집에 가서 “May I use your phone?”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미국서는 도수제가 아니지만. 이런 합리주의에도 불구하고 family ties가 아직도 강하다는 것은 확실히 뜻밖의 발견이었다.

3Billhorse-riding에 미친 쾌남. 하루는 바로 앞의 어머니 집에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기도가 끝나자 어머니가 내게 어떤 교회에 나가느냐고 묻는다. “I am emotionally an atheist.”했더니 이 친구 툭 튀어나와 “I'm too.” 하다가 어머니에게 군밤을 한대 먹었다. 그들은 EUB(Episcopal United Brethren)라는 낯선 denomination 소속. 어머니는 경건한 Christian이지만 젊은이들의 신앙은 다분히 습관적인 듯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fundamentalism은 교육받은 사람에게서 거의 완전히 버림받고 있었다. 26살 난 막내아들 Roy의 저녁 초대가 있었는데 며느리는 재색겸비한 MSU출신의 중학 교사여서 오래간만에 지적 대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이 집은 대체로 딸, 며느리들의 학력이 높고 똑똑한 것이 눈을 끌었다. 예외 없이 여자 쪽 교파로 개종한 것은 흥미로웠다. 큰 아들은 Catholic, 셋째, 째는 Lutheran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보고 미국 가정의 power distribution을 속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The Tuckeys의 경우, 여자 쪽이 고등교육을 받았으니까 필연적으로 matricentric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다음에는 Fairgrove로 맏사위를 찾아 갔다. Mr. Mantey는 독일계의 의욕이 넘쳐흐르는 장년이었다. MSU 농과 출신으로 대농장을 갖고 또한 pedigreed seed producer였다. 완전히 기계화된 농장을 샅샅이 안내받았는데 거의가 자기 손으로 설계해서 지었다는 시설은 정말 놀라웠다. 과연 Khrushchev가 두 손 들었다는 미국의 농업이었다. 그러나 기름진 Michigan의 농토가 공장에 계속 침식당하는 것은 shame이라고 개탄하는 Roy의 말을 들어보면 세계적인 농업의 사양 현상은 미국서도 예외가 아니다. Carl은 아직도 자기 이름을 만타이[mantai]라고 독일식으로 발음했다.

Midwest에는 독일계가 많이 산다. 특히 German이 집중되어 있는 Wisconsin에서는 World WarKaiser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독일의 승리를 다짐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Dorothy는 부드럽고 여자다워 사위와 대조를 이루었다. 독일계 가정에는 남자, 이탈리아계에는 여자가 dominant 하다던 사회학 강의가 생각났다. Herr Mantey21녀를 두고 있었는데 아들이 조금 잘못하자 보기 민망할 정도로 무섭게 꾸짖었다. 역시 German style discipline이라 느껴졌다. 19세기 말까지는 미국에서도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교육받았다는데 지금은 극히 민주적으로 되었다니까 Mantey의 방식은 구식이라 할 수 있다.

떠나는 날은 Mrs. Tuckey의 친정부모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80넘은 두 분이 정원 가꾸기와 TV로 소월하고 있었다. 그래도 외롭지 않다니 잘 이해가 안 되었다. 하나 노인을 잘 모시는 한국의 미풍을 얘기하니까 상당히 부러운 눈치였다. 두 분은 chartered bus가 떠나는 Caro까지 우리를 배웅해주었다. MSU에 돌아온 외국 학생들은 각자 경험을 털어 놓고 토론했으며 report도 만들어 냈다. 가족 간의 친근감의 결여가 많이 얘기되었는데 이것은 역시 독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child-rearing method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요즘 득세하고 있는 humanistic psychology에서는 어머니가 젖을 먹이고 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아주는 동양식 육아 방법이 좋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다. 별의별 재미있는 얘기가 많았다. Yugoslavia 여학생은 host family가 세끼 sandwich만 먹이더라고 분개했다. Greece 학생은 widow의 집에 있었는데 매일 밤 술 마시고 밤 새 춤을 추자고 했다고 개판이라 했다. But he was the right man! 그는 알려진 playboy였다. 결국 typical American family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MSU를 떠나기 전 우리는 International Student Serviceanother home stay를 신청해 놓았었다. Chicago에 내리니 Aaron Scheinfeld 내외가 마중 나와 있었다. 부인이 운전하는 차로 Lake Michigan을 끼고 북쪽으로 scenic highway를 지나 조용한 숲길을 달려 부자들만 산다는 Highland Park에 도착했다. 환갑을 지낸 이 부부는 Lithuania출신 Jewish. U. of Wisconsin을 나온 지성인이었다. Mr. ScheinfeldManpower, Inc. (temporary job을 알선하는 전국 규모의 회사)chairman of the board로서 본래는 변호사였고 세계 각처를 널리 여행한 세련된 교양인이었고 부인은 Heifetz에게 인정받은 violinist였다. 그는 자칭 humanitarian, cosmopolitan이었는데 실제로 Chicago Medical School에 거액을 기증하는 등 교육, 문화, 사회사업에 활약이 컸다. 그들은 겨울에는 시내 apartment에 살고 여름에는 이 곳 별장을 쓴다는데 숲을 이룬 넓은 정원에는 golf course, swimming pool이 있고 maid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upper high class의 생활을 보게 된 것이다.

Cass City에서와는 달라 처신에 조심이 되었다. 입맛 돋우는 predinner cocktail로 시작되는 만찬음식도 퍽 고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서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폭넓은 지식의 소유자여서 화제는 종횡무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형적인 유대인이고 철저한 private enterprise의 옹호자였지만 종교적으로는 liberal이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유대교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Jewish Temple에는 identity를 위해 1년에 한번 간다고 했다. 부인은 여간내기가 아니었으나 Mr. Scheinfeldpiano를 치고 violin을 켜며 chanson, Lied, negro spiritual song을 불러 넘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 아우는 Columbia의 유전학 교수, 큰 아들은 Manpower의 부사장, 작은 아들은 U. of Chicagoanthropology major, 사위는 White House 법률고문, 쟁쟁한 집안이었다. 해외여행을 자주 해서 견문을 넓히기도 하지만 이 부부는 외국인들을 초대해 견해 교환을 하는 것이 빼놓지 못할 취미인 것 같았다. 많은 명사 중 Romania 부통령이 묵고 간 것이 큰 자랑이었다. 영감님이 출근하면 마나님은 방에서 편지 같은 사무 처리를 하다가 나와 우리와 같이 수영과 golf를 하고 shopping에도 데리고 간다. 바쁘면 이웃 미망인에게 부탁해서 근방 명소 관광을 시킨다. 저녁에는 넷이 모여 노래와 이야기로 마냥 즐겁고, 사흘 동안 팔자에 없는 호사를 하고 한국 친구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IU에서의 고된 첫해가 끝났다. 허탈감에 빠져 있노라니 같은 Hall에 사는 BenAlabama의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Russian history를 전공하는 친구로 퍽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North Carolina에 있는 누이에게도 가야겠고 Deep South를 볼 절호의 기회라 쾌히 응했다. Ben이 모는 영국제 2인승 Sunbeam을 타고 Kentucky, Tennessee를 지나 9시간을 계속 달려 해지기 직전 Birmingham에 도착했다. Ben의 부모는 교외의 아담한 집에 살고 있었다. Mr. Benford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어 투자수입과 연금으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한다. 녹초가 되어 저녁을 마치자 곯아떨어졌다. 이튿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마침 local election이 있다기에 Benford 내외를 따라 투표장을 구경하고 유지들과 정다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곧장 Southern Alabama에 있는 Ben의 외할아버지 댁을 향해 떠났다. Georgia 접경 가까운 Doublehead 에서는 70 넘은 Hamlin 내외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가자마자 점심을 먹고 160acre 되는 목장을 둘러본 다음 차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에 나섰다. Mr. Hamlin이 태어난 집, 일생 다닌 Baptist Church를 일일이 보고 가족묘지까지 안내되었다. 한바탕 선조들의 자랑을 늘어놓더니 tombstone을 사진에 담아 달랜다. Southerner들은 family ties만 강한 줄 알았더니 ancestor worship도 있다.

Ben의 이모까지 끼여 저녁을 먹고 늦도록 한담을 즐겼다. 본바닥 Southern accent는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남부 사람들은 친절하고 인정이 많아 호감이 갔다. 과연 Southern hospitality는 듣던 그대로였다. 인종문제는 내가 일부러 피했지만 그들이 먼저 들고 나왔다. 이 문제는 Yankee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의 폭발로 연결되었다. 남부는 미국의 stepchild라는 것이다. “rotten politician,” “the most arrogant man I've ever seen” 등등 Bobby Kennedy 욕을 실컷 듣고 잠들었는데 새벽에 Ben이 흔들어 깨운다. “Senator Kennedy was shot!” 뛰어나와 TV를 보며 아침을 들었다. Bobby는 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 안됐다고 하면서도 기도를 인도하는 Mr. HamlinKennedy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Southern Christian의 양심이구나! “This is a sick country.”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도 좋은 사람들이 어떻게 흑인들에게, 아니 이제는 같은 백인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동부 행 bus에 오르면서 enigmatic Southern mentality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Columbus 근처의 순박한 농부 Max, 충실한 아내 Marcia, 귀여운 남매 DavidCarla, 그리고 New York에서 연말을 같이 보낸 Spain계 화학자 Leny와 청초한 아내 Mona모두 그리운 얼굴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 같은 것.

<時事英語硏究>, 1972. 9, 90-93; 10, 114-117; 11, 1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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