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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Himalaya

랑탕_히말라야_그리고_<WILD>

by S.jeanne 2015. 4. 23.

29, 영화티켓을 버리지 못하겠는 기분이 들어 다이어리에 껴놓는다. 다리어리에 무언 갈 적을까 싶어 끄적거리고 보니 버킷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죽기 전 까지 하고 싶은 일 50가지. 곰곰이 생각하고 적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다. 10가지 정도 적었을까? 그 중 가장 첫 번째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트레킹’ 90일간의 트레킹 떠나기.

 

보고 나온 영화는 <WILD>였다. 셰릴 스트레이트의 90일 간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트레킹여정을 담은 로드무비.

 


 

그리고 버킷리스트의 두 번째는 히말라야 등산하기를 적었다. 사실은 이미 다녀왔기에 기쁜 마음으로 옆에 갈매기표시도 그려넣었다. 갈매기표를 그려넣으며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고 나니 내가 삶의 큰 기쁨들을 무시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새해를 나는 히말라야 산맥 위의 한 마을에서 보냈다. Kangjin Gompa 라는 마을은 해발고도 4,000m에 앉은 랑탕리룽(랑탕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장 마지막 마을이다. 산악인들은 베이스캠프라고 부르겠다. 이번 소식지에 내 등산기와, 내가 등산하면서 느낀 많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영화 <Wild>를 소개하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벌써 일 년의 반이되기 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동안 조금 지쳤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새해를 맞는 설산의 이야기다.

 

 

내가 포기하더라도 용서해줘.’

오늘은 하루 종일 엄마를 생각했어.’

- 셰릴 스트레이트

 

 

셰릴 스트레이트. 그녀는 혼자 트레킹을 떠난다. 영화 포스터에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로 돌아가겠어.’라고 크게 쓰여 있어 나는 처음 이 영화가 무척 보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이라는 건 뭘까. 나는 딸이라는 자리에 놓이는 거, 버겁던데. 그치만 이미 표를 사놓은 터라 용기를 내서 영화관 자리에 앉았다.

 

셰릴은 엄마의 죽음 후에 무너진 자신을 발견한다. 무너진 자신과 함께 발견한 여행책자, 그렇게 여행은 시작된다. 철저하게 혼자인 채로 보내는 날들. 더위와 추위. 발에 맞지 않는 신발, 빠져버린 발톱. 하루 종일 엄마를 생각하는 날. 하루 종일 같은 노래를 끊임없이 떠올리던 날. “길이 되느니, 숲이 되겠어요.” 엄마가 즐겨 부르던 노래. 불쌍한 어머니, 개 같은 아버지. 붉은 피를 흘리며 눈을 끔벅이던 말의 죽음. 눈을 먼저 보낸 엄마의 죽음. 비 오던 날 아이의 노래, 진탕위에 꿇은 무릎.

 

그녀가 그렇게 진탕위에 무릎을 꿇던 순간 하늘을 보았던가, 눈물을 흘렸던가, 고개를 숙였던가? 그녀의 여정은 나의 여정과도 비슷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혼자가 되어 오랜 시간을 걸으면 기억하고 싶지 않던 기억들과 기억해야할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나보다. 좋아하는 노래나 싫어하는 노래를 끊임없이 흥얼거리나보다.


“Fade In”



<히말의 하늘, 별.>


 

1st Day

등산이 시작되었다. 눈 덮인 산은 저 높이 저 멀리 상투를 내놓고 있지만 주위는 완전하게 푸르고, 검다. 눈으로 담은 것이 사진으로는 잘 담기지 않아 카메라를 내려놓고 노트를 펼쳤다.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내 손으로 그려 기억하는 일만큼 완전히 기억되는 것은 없다.

 

낯선 아빠, 어제는 아빠의 옆얼굴을 그렸다. 아빠와 함께 떠나 온 여행이지만 나는 꼭 혼자이고 싶었다. 그날 밤 해가 진 온통 까만 산이 너무나 멋있어 홀로 서있고 싶었던 순간, 날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잠시 무시했다. 걱정스레 내민 손도 슬쩍 뿌리쳤다.

 

까만 밤하늘의 별은 맑고 가깝다. 별을 보는 일을 하는 한국에 두고 온 애인을 생각한다.

 

그날은 한참을 산을 오르다, 나무로 엮인 끼걱 되는 다리를 만났다. 다리위에 서니 물소리가 힘차다. 저 얼음산에서 갠지스로 흐르는 이 물과 그 물을 먹는 나무들은 참 완전하다 싶어 가만 걸음을 멈췄다. 멈춘 김에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았더니, ‘아 내가 내 걸음으로 이만큼이나 올라왔구나.’ 싶다. 돌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장엄한 모습이다. 몇 걸음을 더 가니 작은 롯지(산장). 설탕을 가득 탄 블랙티를 마시고 당을 충전해서 다시 오를 차비를 했다.

 

 

2nd Day

산행을 함께 하는 일행의 아저씨와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에 대해도 이야기한다. 컴퓨터를 연구하시는 전문가. 이야기는 유쾌하지만은 않아도 무척 재미있다. 그러던 중 저 큰 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라 해주신 이야기는 가슴을 때린다. 세상에 아저씨는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게 나무인 걸 어찌 아셨나. 아저씨가 저 멀리 앞서가시자, 가만 손을 대본다. 나무가 나보다 멋져서, 그 잠시의 시간만을 들이고는 안을 수는……. 없겠더라.

 

산장에 사는 아이들이 참 예쁘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해발 2,000m가까이 되는 마을에서도 내려가 학교에 다니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일꾼으로 산장에서 일을 한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는건 부모가 있는 아이들에게도 무리여서 아이들은 카트만두에서 따로 생활한다.)

밤에는 산장에 사는 4살 즈음 되어 보이는 롯지의 막내와 노트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일행의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계속 쵸코바를 주시기에 안주는 편이 좋다 말씀 드렸지만 퍽 안쓰럽게 여기시는 듯 하다.

 

이 아이() 나이 들면 편하게 해줘.’

-영화 <WILD>

 

산은 온통 말똥, 소똥 밭이다. 열심히 피해가며 걷지만, 밟지 않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3rd Day

하늘이 산을 마중 나왔다. 햇빛이 눈에, 산에 녹아든다.

 

3일을 걸으니 해발 3000미터가 가까워진다. 원숭이도, 소와 교배하여 크기가 작은 야크들도 많다. 나무들의 식생은 이제 온대 지방의 것으로 조금 바뀐다. 산의 밤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셨다. 물론 나도 건배를 해주곤 하지만 나는 금방 방으로 올라와 일기를 썼다. 그게 서운한걸까?

이제는 나무를 하나하나 그리진 못하고, 산들을 그린다. 산은 그리기가 쉽고 갖고 있는 에너지가 크니 바삐 그려도 쉽게 살아있는 듯 한 선이 나온다.

이제 물들은 힘차게 흐르기보단 노래하듯 흐르고, 산속에선 음표가 솟아오르는 작은 폭포를 마주했다. 그 일이 너무나 기분 좋아 그 아래 앉아 노래를 부르고, 부르다 일어나 다시 걷는다.

 

나는 밤의 까만 산이 멋있다. 그 무섭도록 장엄한 산의 모양을 보고 있으면 신이 잠시 날 그의 곁에 불렀나 싶어진다. 나는 산이 무섭지 않다. 산의 말에 귀 기울이면 밤의 산도 무서운 곳은 아니다. 저 아득한 계곡 밑으로 흐르는 거대한 물소리도 기분 좋게 긴장시킬 뿐.

 

저기서 아빠가 날 부른다. 이런 해가진 산은 위험하다 이야기하는 아빠는 한참을 날 기다렸나? 이번엔 내가 먼저 손을 잡는다. “미안해요, 어서가자.”

 

 

4th Day

셰릴……. 걷지 않을 때는 뭘 하고 싶어?’

-셰릴 스트레이트

 

무얼 찾으러 여기에 왔나. 출발 전 인도에서 요가를 공부하신 은사님과 밥을 먹으며 산행에 대해 또 네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를 찾아오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를 찾는 것이 뭘까. 머리에 맴돈다. 모르겠다. 나에 대해는 진작 알고 있는 것만 것 만 같은데 뭘 알아 가면 나를 찾게 되는 걸까. 모르겠다.

 

푸른 산, 그 뒤의 붉은 해. 이제 설산이다. 드넓은 협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 한가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나인채로 서있다. 어떤 수식어도 붙일 필요가 없는 심장을 단 무어는. 숨이 차오른 채 이 위에 섰다.

 

4,000m, 베이스캠프가 가까워 온다. 앙상한 가시나무들만이 보인다. 그 가시나무를 갈아 만든 ‘Seabuck Throne Juice’는 오렌지 주스 맛이 난다.

 

이제 저 멀리 거대한 빙하로 된 폭포가 보이고 위로 보이는 산봉우리의 개수는 줄어든다. 함께 온 셀파가 저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가 랑탕리룽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렇지만 올 한해 눈이 너무 많이 와 아무도 가볼 수는 없다고. 우리는 그 옆의 작은 봉우리를 오를 거라 한다.

셀파와 나눈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그는 27인데 벌써 3살 난 딸아이가 있다고 한다. 2년 정도 수행을 할 생각이고, 언젠가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약간은 씁쓸한 맛이 혀끝을 스쳤지만 그도 그의 생애주기를 가치 있게 쓰려는 것이구나 싶다. 우리 사회가 엉망이라고 그들의 말을 씁쓸해 할 이유는 내게 없지. 그저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노래를 배우기로 한다. 포터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짐을 머리에 이어서 메고 굽은 등으로 빠르게 산을 타는 그들에게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다. 먼발치서 꾸벅 하고 인사를 하는 적이 더 많다.

 

 

이런! 작은 바위를 넘어서니 발치에 알록달록 예쁜 마을이 작은 분지모양으로 쏙 앉아있다. 옆에는 근사한 계곡과 캄캄한 설산을 두었다. 칸진곰파,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다.

 

1231, 4. 한국은 여기보다 3시간 15분 느리니 벌써 저녁이겠다. 국제전화가 되는 가게들이 마을에 있다고 하기 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그는 뭐하고 있을까. 엄마는 뭐하고 계실까. 아마 둘 다 조금은 걱정스런 마음일 텐데. 가게에 가서 국제전화를 물었다. 함께 간 동행의 언니가 앞서 통화를 한다. 언니의 통화가 도중에 끊겼다. 충전방식으로 사용하는 가게의 국제전화가 동났다고 한다. 별 수 없지. 여행을 떠난 이후로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여행을 만들곤 했으니까. 걱정 말라는 말과 새해 인사는 전하고 싶었지만…….

 

밤 아까의 국제전화가 되던 가게에서 사온 ~~! 케익!”을 앞에 두고 다 같이 모여 초를 붙인다. 한국시간으로 한번, 네팔시간으로 한 번, 신이 나게 건배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따또(따듯한) 락씨(네팔 전통 소주)를 밤이 깊도록 마셨다.

 

 

5th Day

아침이 왔는지 아빠가 날 부르며 내방에 와 침대 맡에 앉는다. 커튼을 걷으니 저 산 너머로 해가 뜨고 있다. 창밖 부지런히 밖에 나와 계시던 어른들과 함께 마을의 티벳 불교 사원에 가서 기도를 드리러 간다. ‘롱타라는 색색의 경전 깃발도 소원을 적어 사원에 건다. 마음과 몸이 건강한 한해를 나도, 사람들도 보내길.

 

숙소로 돌아와 아껴두었던 라면으로 새해맞이 식사를 한다. 우와, 정말 맛있어. 술이 덜 깬 탓인지 영 먹기 불편하기도 하지만 꿀맛이다. 아침 후 조금 쉬다가 마지막 등산, 작은 설산 봉우리를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 쓰러질 듯 잠시 누웠다. 체했나보다. 몸이 말이 아니다. 고산증세 중에 하나가 체하는 것인데, 나는 그동안 한번 아프지 않고 잘 올라 왔다 싶어 방심했다. 마지막 일정인 산행, 참여하고 싶은데. 아빠가 손을 마구잡이로 따주신다. 아빠도 함께 오르고 싶으신가? 끙차, 기운을 내서 신발끈을 맸다.

 

4,300m,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거세진다. 숨이 무지막지하게 차다. 바지의 버클을 푸르고 나니 좀 살 것 같다. 체기가 남았나보다. 머리가 팽팽 도는 가?

 

4,500m 이제는 내려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마지막 더 이상 위로 난 길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오르기 위해 작은 가파른 봉우리를 엎드려 걷다시피 오른다. 잠시 머리 아픈 일도 잊히고 산만 보인다. 눈구름에 닿은 설산. 하늘에 닿을 설산. 눈이 무릎까지 빠지지만, 기도하는 기분으로 오른다. 봉우리위에 다 와가자 땅에 입을 맞췄다. ‘시바 신, 안녕하세요.’ 나의 신은 아니지만. 그 땅엔 시바가 사는 것 같았다.

 

눈발이 거세지기에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길엔 엉덩이로 썰매를 탄다. 서둘러 내려간다. 내려오니 몰골이 우습다. 정말 산에 눈보라가 치면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구나.

 

돌아와 저녁 내내 앓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게 아 이래서 체해서 죽는 구나 싶었다. 다행이 일행 중에 수지침을 놓는 분이 계셔 한 시간이 넘게 손을 따고 등을 두드리고 하니 밤이 되어 기운이 조금 났다. 꼭 오늘 쓰고 싶은 한 통의 편지를 쓰고 잠이 들었다.

 

 

6th Day. 하산.

아침이 되자 챙겨온 누룽지를 끓여 밥을 좀 먹었고, 괜찮아졌다. 그 이후로 눈이 계속 와, 밖은 한참을 들여다봐야 눈 덮인 지붕의 모양이 보일 지경이다. 1m 20cm가 쌓였다고 한다. 마을의 하산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누가 먼저 하산을 시작해서 길을 뚫어주려나 걱정한다. 아무래도 헬기를 타고 내려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들도 곳곳에서 나온다. 그렇게 조금 걱정의 시간을 보내니 우리 숙소에 함께 묵던 용감한 프랑스인 일행이 길을 나선다. 우리도 뒤 따라 가기로 한다.

 

눈이 허리까지 온다. 뭘 모르는 나는 이 상황이 재밌지만,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조심해야한다. 가던 길에 목이 말라 새로 보송보송 쌓이는 눈을 퍼서 입에서 녹여 먹는다. , 완전 우유 빙수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필코 딸기가 올라간 빙수를 먹겠어. 또래의 일행들 사이에선 빙수이름대기가 시작됐다.

 

야크들도 길이 없으니 사람이 걷는 길을 함께 간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하산은 유달리 외롭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 생각을 해 보고 나니, 사그러든다. 엄마, 엄마도 날 용서해.

 

며칠 전 묵었던 롯지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눈이 비로 바뀐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지만 일행이 모두 지쳤다. 원래의 목표점에서 두 시간쯤 못 미치는 곳에서 묵기로 한다. 산 아래에서 구름이 산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구름이 해와 함께 덮쳐오는 모습이 장관이다.

 

비가 오니 이끼가 깨어, 비 냄새가 눈에 보인다.

 

짐을 풀고 이른 저녁부터 일행과, 포터, 셀파 모두 불가에 모였다. 하산은 오를 때보다 시간이 적게 드니 밤이 길다. 이 산길의 큰 롯지들 중에는 같은 가의 자매들이 3명이 있다. 모두 각자의 롯지를 운영하며 지낸다. 이들에게는 서로를 오가는 제법 험한 산길들이 그저 마을에 나있는 길일뿐이다. 오늘 묵은 롯지를 관리하는 분은 그 중 첫째이다. 가장 머리칼이 길다. 길고 검은 머리에 바르는 기름을 우리에게 내어보여주셨다. 빛나는 머릿결을 가진 아낙. 아낙은 우리가 모여 앉은 불에 지푸라기와 말똥, 야크똥을 뭉쳐서 말린 연료를 가져와 넣어주신다. 아빠는 그것을 손에 들고, 나에게 잡아 보거라 하신다. 이곳의 불에는 쓰레기를 넣지 않는다. 그리고 쉽사리 꺼트리지도 않는다. 귀하고 성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 불길을 사진에 담아보니, 고맙게도 그들이 피운 마음이 담겼다. 이 정도의 사진이라면 엽서로 선물해도 좋아해줄 친구들이 많겠다.

 

긴 밤, 술판이 벌어졌다. 귀한 야크고기와 누군가 배낭에 짊어지고 온 스팸 한통이 귀한 안주가 된다. 네팔 사람들, 포터와 셀파로 살아가는 세르파족(몽골계의 사람들이며, 산을 타는 일을 하는 셰르파들은 서로 친척뻘이라고 한다.)은 흥이 많다. 네팔의 민속노래인 레싼삐리리는 한국의 아리랑처럼 돌림노래로 부르고, 끝없이 부르고, 가사를 덧붙여도 부른다.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고 그들은 레싼삐리리를 부른다. 다함께 춤판도 벌어졌다. 한쪽 발을 천천히 구르며 팔을 돌리는 그들의 춤이 낮은 조명아래에서 빛난다.

모두 술을 더 마시니, 노래판이 되었다. 모두 한 곡씩 뽑아보라 한다. 함께 온 내 또래의 언니는 사실 첫 날 진즉 노래를 한곡 뽑았더랬다. 산에 오르며 내내 노래를 부르던 일을 애전에 들켜 이제는 나도 피하기 어렵다. 게다 모두 한곡씩 한 뒤이니 새삼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나는 신명나는 노래를 잘 알지 못하고, 오는 내내 부르던 그 노래는 어쩌면 슬픈 노래이지만. 산을 보면서 수십 번 부를 만큼 산과 어울렸다고 미리 언지를 한다.

부른 노래는, <당신에게로> 라는 뮤지컬 피맛골 연가의 넘버이다. 구슬픈 가락에, 구슬픈 목소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고자 하는 슬픈 사연의 여인의 노래인데, 나는 마치 그 산이 당신인 것만 같아. 산을 오르며 노래를 부르다 수십 번도 더 저 산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었다.

 

원삼저고리, 열 두 폭 치마, 떨리는 족두리, 수줍은 연지도.

모두 당신만을 위한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춤추는 새들과 함께, 만발한 꽃들과 함께. 나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기다리는 당신 곁으로.

얼마나 반가울 까, 우리 다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다시 만나면.

우리 다시 만나면 헤어지지 말아요. 눈치 보지 말아요.

우리 다시 만나면.”

 

 

 

7th Day

그저 보내시지는 않으려, 떠나보내는 당신이 운다.

 

오늘은 땅위를 열심히 살핀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돌을 가져다주겠다 약속했던 배곳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작은 돌들, 가끔 큰 돌을 몇 개 줍는다. 허락하지 않은 돌을 가져갈까 싶어 욕심내지 않으려 애쓴다.

 

저녁, 대나무가 자라는 곳까지 내려왔다. 더 긴 산행코스를 바꾸어서 온 길 그대로 내려가기로 했던 것이라 빨리 도착했다. 아직 해는 두어 시간 남았지만 마을에 걸터앉으니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비가 좋았다. 아직 쓰지 못했던 한 통의 편지를 마저 쓴다.

 

윤아,

윤아야 네게 줄 엽서를 고르지 못해 일기장에 우선 적는다. 그래도 네게 줄 작은 돌 하나는 구했어. 히말라야는 정말 멋졌고 나는 신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편지가 어찌나 날 기쁘게 했는지 굳이 두 번 말하지는 않을게. 윤아야 나는 지금 하산길이고 내가 보는 이 풍경을 담아 엽서의 앞면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올라가는 4일 낮 동안 날이 무척 맑았어. 작은 봉우리의 정상 근처까지도 갈 수 있었지. 그리고 그날 밤 내려오는 길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아침에 1m가 넘게 쌓여있었어. 걱정스런 맘으로 쫓기듯 내려왔고, 지금은 고도가 낮아져 눈은 오지 않지만 비가 온다. bamboo라는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야.

그래서 나무의자에 앉아 비 내리는 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네게 편지를 적는다. 내려오는 길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내쫓듯이 눈이 오기 시작한 일을 서운해 하니 산이 그런 날 위로하는 것 같아. 나는 비를 위로로 여기곤 하잖니.

좋은 이야기만 썼지만 사실 7일째 머리도 못 감고 고생이야. 윤아야. 나를 이해하려 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늘 고마워. 너는 비록 멀리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지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새해 복 많이 받아.

2015.1.3. 하니가

 

오늘도 밤이 길다. 흥이 오르고, 이야기가 깊어지고. 숲속에서의 잠이 달다.

 

 

8th Day

아침, 마을에 낀 물안개 속에서 한 컵으로 세수를 하고, 반 컵으로 양치를 하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내려갈 때가 되니 더 여유를 부려본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좋다.

 

올라오는 길 처음 발견했던 시스눅이라는 가시 돋친 풀로 끓인 국을 다알대신 오트밀과 함께 아침으로 먹었다. 네팔에 와서 멋진 개들은 많이 봤지만 고양이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롯지에서는 고양이를 키우나보다. 표범무늬가 아른하게 새겨진 고양이가 가르릉무릎위에 앉는다. 출발할 즘이 되니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물소리만 힘차다.

 

이제는 정말 하산인 것이 실감난다. 이제 오늘, 산의 가장 아래에 있는 마을로 돌아갈 것이다.

 

두고 온 그를 생각나게 하는 고양이며, 힘찬 물소리며. 시원하게 울고 난 뒤의 갠 하늘이며. 돌아보는 저 설산도. 이제는, 다시 내려가서 보고 온 것을 전하며 살아갈 마음이 들게 한다. 서운하기만 했던 마음은 비와 함께 그쳤다.

 

 

우리가 돌아갈 집이 없는 건 아는데 그래도……. 우리 같이 살자.

돌아가면 같이 살 집을 알아보려고 해. 힘들겠지만 그래도.

셰릴 스트레이트

 

“Fade Out”

 

 

 

글을 시작하니 지루해 읽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줄이게 된다. 그렇지만 언제고 그대들과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시는 날에는 산의 가장 아래에서 맞은 밤과, 카트만두의 여행이야기도 전할 수 있을 거다. 지면이 허락한다면 산의 사진 몇 장도 함께 실어달라고 해야지. 그거면 모든 게 다 이야기 될 지도 모르겠다. 소식을 전하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하단 것. 새삼 소식지가 생겨난 일이 기쁘다.

 

영화 소개가 시답지는 못했지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히말라야에서 깨닫지 못했던 산의 이야기들을 영화를 통해 들을 수 있었으니.

 

나는 삶의 행복한 순간들을 모아가며 살기로 한다. 하나 둘 열심히 해 갈수록 점점 높아지던 내 이상과 목표는 언제나 나를 부족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러나 내려가라이야기하던 산은. 부족한 내가 부족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지 않을까, 다시 생각한다. 행복한 순간들을 모아가며 기쁘게 사는 것이 곧장 나태가 되지는 않을 수 있단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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